前국립현대미술관장 이경성옹 수필집 ‘망각의 화원’ 펴내

  • 입력 2004년 2월 2일 19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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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에 사는 어느 외교관이 지르는 악 소리가 실내를 가로지른다. 그는 치매에 걸려서 하루에도 몇 번씩 고성을 내지른다. 2층에는 의사 출신 치매환자가 있는데 별일도 없으면서 옆에 사람만 없으면 간호사를 불러댄다. 인생에 지쳐서, 치매에 걸려서 정신이 없는 그들의 행동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움직여야 하고 때가 되면 먹어야 하는 그들의 행동은 몹시 무(無)목적적이다. 인간에게 욕심과 희로애락의 감정을 빼고 나면 허전한 허무의 세계가 지배한다. 깊은 밤 치매 환자들이 지르는 악 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때로는 저 사람들처럼 자기를 잃어버리고 악을 썼으면 좋겠다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미술평론가 석남 이경성(石南 李慶成·85)씨가 최근 펴낸 수필집 ‘망각의 화원’(삶과꿈 간)에는 ‘늙어가는 쓸쓸함’이 솔직하게 배어 있다. 상처(喪妻)하고 외딸 부부마저 이민가는 바람에 홀로 남은 그는 화려한 젊은 날을 보내고 이제는 자연인으로 돌아온 한 평범한 노인이 느끼는 삶과 인생의 고민들을 담담하게 토로했다.

‘노인의 일상이 끝없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젊은 사람들은 결코 모를 것이다. 나는 부디 곱게 늙어 편안히 죽게 해 달라 기도하지만 뜻대로 되겠는가.’

‘노환보다 더 힘든 병이 고독이다. 혼자서 짓눌리는 침묵의 고독을 견디기보다 차라리 옆에 있는 사람과 악을 쓰고 욕을 하고 싸우고 미워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더 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미술평론가 1세대로 손꼽히는 석남. 두 차례의 국립현대미술관장과 워커힐미술관장을 거쳤고 홍익대 교수, 삼성문화재단과 현대미술관회 이사 등을 지내면서 화단((화,획)壇)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그는 지금 서울 평창동의 한 노인병원에서 홀로 살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곱게 늙기 위해서는 ‘자랑하지 말고 잔소리하지 말고 이제는 내 차례가 아님을 인정하고 욕심을 버리고 몸은 비록 늙었어도 정신은 늘 먼 데를 바라보는 낭만을 가질 것’이라고 조언한다.

2일 오후 서울 모란 갤러리에서는 그가 만든 ‘석남미술상’ 시상식과 함께 수필집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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