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칼럼]'앙꼬' 없는 찐빵 먹는 법

  • 동아일보
  • 입력 2004년 1월 9일 18시 32분


과거 정권 시절 ‘성역 없는 사정(司正)’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결과와 상관없이 당시엔 사정 대상을 제외한 모든 이를 속 시원하게 해준 말이었다.
올해는 ‘고용 없는 성장’이 유행할 조짐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004년 10대 트렌드 중 첫 번째로 꼽았고 한국은행 총재는 “고용 없는 성장이 나타나고 있다”고 아예 현재진행형으로 못 박았다.
▼고용 없는 성장의 잔인함 ▼
고용 없는 성장이라니, 경제가 암만 좋아진대도 옆집 아저씨가 무직이면 불황이고 내가 실직하면 경제위기인 법이다. 마치 앙꼬 없는 찐빵처럼 앙꼬만 빼먹은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가뜩이나 고픈 배가 아파지기까지 하는 고약한 처지에 놓이게 생겼다.
우리 정부가 이에 대한 해답으로 내놓은 게 투자활성화를 통한 고용창출이다. 기업도 구직자도 흐뭇해질 만한 모범답안이지만 상황을 들여다보면 고프고 아픈 배가 결국 뒤틀릴 가능성이 적지 않다.
첫째는 수시로 바뀌는 대통령 말을 믿기 힘들기 때문이다. 새 정권 출범 후 몇 번이나 같은 정책을 강조했지만 결과는 거꾸로였다. 올해는 대통령부터 총선에 모든 걸 건 판이어서 경제우선 방침조차 지켜질지 걱정이다.
둘째, 정부 내에서도 두 말이 나와서다. 재정경제부는 고용효과가 큰 서비스업을 중점 지원하겠다고 밝힌 반면 산업자원부 장관은 취임 일성으로 선진경제에서도 중요한 제조업을 돕는 데 힘을 쏟겠다고 했다. 그 덕분에 서비스업도 살고 제조업도 커지면 더 바랄 나위 없으나 손발 안 맞는 정부는 때와 장소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대통령만큼이나 위태하다.
셋째,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아무리 내 나라지만 과연 이 땅에 투자할 가치가 있느냐다. 내가 제조업체 사장이래도 중국보다 임금은 열 배, 공장 지을 땅값은 40배가 넘는 우리나라에 투자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국가경쟁력은 날로 떨어지는 마당에 서비스업이라도 살리려면 개방을 해야 하는데도 의료는 의사가, 교육은 교육자가 완강히 막는 형편이다.
안타깝지만 21세기 성장 핵심인 지식사회로의 도약도 쉽지 않을 듯하다. 한국의 암기식 교육으로는 지식산업에 바탕을 둔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진단은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진작 내렸다. 그럼에도 엘리트를 기르는 교육개혁은 현 정권의 코드상 나오기 힘들다. 따라서 이젠 상투적인 용어가 됐지만 ‘획기적’ 개선책이 없는 한 올해 경제사정도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지 싶다.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은 고용 없는 성장이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화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근로자 쥐어짜기가 경영합리화로 인정되면서, 고용감소 특히 제조업부문의 고용감소는 구조적 산업변화에 따른 영구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중요한 건 줄어든 만큼 새로운 분야에서 일자리가 나오느냐인데 이는 어떤 능력을 지닌 정부를 만나는가에 달린 운수문제가 됐다.
이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야 할 개인이 택할 길은 둘 중 하나다. 내 한 몸이라도 스스로 앙꼬가 되어 나라의 입 하나를 덜어주는 동시에 앙꼬 없는 찐빵이라도 나눠먹을 것인지, 아니면 지난해처럼 남들 발목잡기로 앙꼬 없는 찐빵조차 아무도 못 먹게 만들 것인지.
▼모두가 못사는 것보다 낫다 ▼
앙꼬가 되는 방법으로 누구도 못 따라올 경쟁력을 갖추는 것과 입맛을 낮추는 두 가지가 있다. 잔인한 말이지만 (취업)될 사람은 되고, 할 사람은 이미 하고 있다. 무능한 정부는 아직 안 되고 안 하는 사람의 고마운 핑계가 돼 줄 뿐이다.
정부가 만들겠다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란 사실 근로자하기 불편한 환경임을 인정해야 할 때다. 비정규직은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게리 베커 말마따나 임금 양극화 역시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감수할 수밖에 없다.
유유자적하며 살기엔 이미 힘든 세상이 돼버렸지만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앙꼬 없는 찐빵이라도 못 먹는 것보다 낫다. 다 같이 못사는 사회를 만들 심사가 아니라면 밀가루 반죽에 재를 뿌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김순덕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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