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금 안써도 돈떼나"…기업들, 한도약정수수료에 불만

  • 입력 2003년 11월 19일 18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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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A사는 최근 내년 당좌대출 한도를 10억원으로 계약하면서 거래은행에 ‘한도약정 수수료’라는 명목으로 200만원을 냈다.

A사의 담당직원인 박모씨(28·여)는 “실제로 얼마나 돈을 쓰게 될지 불확실한데 돈을 안 썼다고 다시 돈을 받거나, 한도 설정과 동시에 일률적으로 수수료를 선납토록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기업이 빌려 쓰기로 약속했다가 실제로는 차입하지 않은 돈에 대해 수수료를 물리는 은행이 늘어나면서 기업들의 불만도 높아지고 있다.

은행들은 대출 한도 낭비에 따르는 은행의 비용을 기업이 물도록 해 과도한 한도 설정 관행을 막고 수수료 수입을 늘리려 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들은 은행이 상업성에만 치우쳐 공공성을 너무 망각하고 있다며 불만을 털어놓는다.

▽은행의 수수료 실태=현재 대부분의 시중은행들이 약정한도만큼 대출을 일으키지 않을 경우 수수료를 내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이 2003년 한 해 동안 10억원 한도 내에서 돈을 빌려 쓰도록 약정을 한 뒤 4억원밖에 빌려 쓰지 않았다면 나머지 6억원에 대해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물리는 것.

국민은행은 한도소진율(기업 고객이 대출 한도 내에서 실제 빌려 쓴 돈의 비율)이 50% 미만인 기업 고객에게 연 0.1∼0.5%의 ‘약정한도 미사용 수수료’를 차등 징수하거나 한도를 설정할 때 아예 연 0.2%의 ‘한도약정 수수료’를 미리 받는다.

외환은행은 남은 금액 전부에 연 0.5%의 수수료를 뗀다. 우리은행과 조흥은행은 기업의 신용등급에 따라서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에 대해서만 차등적으로 수수료를 받는다.

반면 은행들은 거래 실적이 좋은 기업이나 특정 상품의 경우 수수료를 면제해 준다.

약정한도 미사용 수수료 도입을 새로 추진하는 은행도 늘고 있다.

기업 고객이 많은 하나은행은 내년부터 기업에 약정한도 미사용 수수료를 물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나은행측은 “남은 돈이 적더라도 수수료를 물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시행 여부와 기준은 내년 초에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의 논리와 기업의 불만=은행들이 약정한도 미사용 수수료를 받는 이유는 △기업들이 필요 이상으로 대출 한도를 늘리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은행의 입장에서도 대출 한도에 대해 일정부분 충당금을 쌓아 비용이 발생하는 데다 △수수료 수입도 얻을 수 있기 때문.

또 기업에 빌려 주려고 조달해 남겨 놓은 돈을 운용하지 못하면 다른 곳에 빌려주었을 때의 기회비용만큼 손해를 보게 된다.

김병연(金炳淵)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 선진국에서는 금융거래의 위험에 따르는 비용은 사용자가 부담하도록 하고 있다”며 “기업과 가계가 필요한 돈의 규모를 스스로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소기업들은 한 해 동안 필요한 자금을 정확하게 예측하기가 불가능해 가능하면 넉넉하게 대출 한도를 받아야 하지만 비용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는 것에 불만을 표시한다.

또 개인들의 마이너스 통장에는 수수료가 없는데 기업에만 비용을 물리는 것도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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