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란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 왜 외국어 브랜드가 판칠까

  • 입력 2003년 10월 13일 17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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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한글날(10월 9일)이 찾아오면 브랜드 전문가들은 통과의례를 치른다. 올해도 각계에서는 “갈수록 외국어 브랜드가 홍수를 이룬다”며 “한글 브랜드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허청도 “등록상표 중 외국어 브랜드가 약 85%”라며 우리말 브랜드 등록을 촉구했다. 과연 외국어 브랜드 홍수시대가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잘못일까.》

태평양의 ‘헤라’ 브랜드 매니저 김진호 과장은 이 질문에 “순수 우리말로 화장품 브랜드를 만들었을 때 소비자가 그 화장품을 고급상품으로 인식할 것 같은가”라고 반문한다.

화장품 브랜드는 신비감, 고품격, 아름다움 등을 연상시켜야 하는데 우리말로는 이런 이미지를 주기 힘들다는 것. 브랜드는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지 사회를 선도하지는 못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세계적인 브랜드와 내수시장을 놓고 격돌하는 상황에서 한글 브랜드 채택은 더욱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

브랜드 컨설팅업체인 메타 브랜드 박항기 사장은 사대주의(事大主義)적인 인식보다는 원산지 효과로 풀이한다.

전 세계적으로 소비자들은 향수나 화장품은 프랑스, 패션은 이탈리아, 자동차는 독일 등 특정제품에 특정 국가를 떠올린다. 이 때문에 전 세계의 향수나 화장품의 브랜드는 프랑스어가 많고 옷이나 가죽 제품은 이탈리아어가 많다.

제일기획 브랜드마케팅 연구소 김익태 박사는 “국내 기업의 국제화가 가속화되고 이미 한국인, 특히 20대 이하 연령층의 의식구조는 국제화돼 있어 브랜드가 어느 나라 언어인가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젊은 층이 영어에 워낙 익숙해 있어 순수 우리말 브랜드인 쌈지도 한글이 아니라 ‘SSAMZIE’라는 영어 브랜드로 표기할 정도.

‘참나무통 맑은 소주’ ‘종가집’ ‘보솜이’ ‘트롬’ ‘INVU’ 등 히트 브랜드를 많이 만들어낸 크로스포인트의 손혜원 사장은 “제품과 시장의 특성에 따라 한글을 쓸 것인가, 외국어를 쓸 것인가를 결정한다”며 “우리말로 브랜드를 만들어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려면 음절과 음절을 결합해야 한다.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는 단어의 수가 그만큼 적다. 한자어도 많다. 때문에 의미와 의미를 결합시키는 브랜드가 많다. ‘산소주’, ‘참진이슬로’, ‘청풍무구’ 등이 대표적인 예.

LG애드 브랜드전략연구소 오명렬 소장은 “외국어 브랜드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푸르지오’ ‘래미안’처럼 좋은 우리말 브랜드가 사회에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며 “좋은 우리말 브랜드는 한 기업의 자산을 넘어서 사회의 공공재(公共財)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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