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60대 '마라톤 청춘' 민계식 현대重사장

  • 입력 2003년 8월 24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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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랗게 젊은 청년도 42.195km를 한달에 두세 번씩 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일에 61세의 노인이, 그것도 연습할 시간이 턱없이 모자란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도전한다면?

현대중공업 민계식(閔季植·61) 사장은 요즘 매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1시간씩 달리기를 하고 있다. 동아마라톤 등 9월 28일부터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열리는 가을 마라톤대회에 모두 참가하기 위해서다.

민 사장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3시간대 완주 기록을 유지하고 있는 마라토너다. 1961년 ‘9·28 서울수복기념 마라톤대회’에서 에티오피아의 아디스 아베베와 함께 뛰어 7위(2시간23분18초)를 한 기록도 있고, 한때 태릉선수촌에 정식 선수로 입소한 경력도 있다.

민계식 사장이 지난 5월 현대중공업 춘계 사내 단축마라톤대회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며 달리고 있다. -사진제공=현대중공업

“나이가 드니까 기록이 떨어지네요. 3년 전까지만 해도 1만명이 뛰면 30등 안에는 들었는데 요즘은 100등으로 밀린다니까. 그래도 달리기를 안 하면 머리가 띵하고 오히려 피곤해서 일을 못해요.”

마라톤에 대한 그의 애착은 남다르다. 미국 유학시절 첫 아들의 우유 값이 없어 좌절감이 밀려올 때도 망망한 벌판을 뛰면서 투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휴학 이후 부둣가 막노동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달리기를 통해 길러온 체력 덕분이었다.

연습을 하는 그의 옆에는 현대중공업 직원들이 수시로 따라붙는다. 이들은 회사 내 300여명의 마라톤 동호회 회원들. 울산의 푸른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8km가량의 방파제는 근육의 피곤함을 잊게 해주는 ‘환상의 코스’다.

민 사장은 미국 버클리대 우주항공학 석사, 매사추세츠공대(MIT) 해양공학 박사 등의 학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회사의 기술개발 전체를 담당하는 최고기술경영자(CTO)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받은 특허만 40여종에 논문 수는 120여편. 주말에도 박사급 연구원들이 “도저히 못 풀겠다”며 들고 찾아오는 공식을 유도하느라 집에 틀어박히기 일쑤다.

“연구 프로그램을 짜고 새로운 공식을 유도하다 보면 훌쩍 새벽이 되곤 하더라고…. 일이 많아서 며칠 연속해 잠을 3시간 정도씩밖에 못 자도 점심 때 뛰면 컨디션이 훨씬 나아져요. 1km도 못 뛰던 우리 직원들도 이젠 제법 잘 뛰어요.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은 내가 싫어하거든, 허허.”

그는 마라톤 코스를 처음 완주한 직원에게는 회사 이름으로 된 커다란 수정패를 만들어주고 있다. 매년 100만원 정도의 사비(私費)를 보태 제작하는 이 수정패는 10회, 20회, 50회로 완주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새로 수여된다.

그는 종종 땅콩버터 바른 식빵 한 조각에 우유 한 잔으로 저녁식사를 때우곤 한다. 바쁜 탓도 있지만 저녁식사 이후의 식곤증으로 낭비되는 시간이 아까워서라고 했다.

“일을 하려면 시간이나 체력이나 모두 잘 관리해야 해요. 자기 속도에 맞춰 즐겁게 살아야죠. 힘들지만 고통의 한계점에 이른 순간 이후 결승점까지는 삽시간에 끝나요. 그 이후의 성취감이란! 인생은 마라톤 같은 겁니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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