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기업⑧-인맥

  • 입력 2003년 8월 12일 17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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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에서 정몽구(鄭夢九) 회장 체제는 1999년 3월에 출범했다. 자동차에서만 30년 권세를 움켜쥔 정세영(鄭世永·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회장 체제의 종언은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인맥의 세대교체까지 불러왔다. 현대 고위관계자의 회고.

"정세영 회장 시절 그의 후배인 고려대 출신들이 요직 대부분을 장악했다. 임원진은 물론이고, 인사 판매 관리 기획부서장까지 고려대 인맥이었다. 이 라인에서 비켜난 사람들은 툴툴거렸지만 딱히 방법도 없었다."

정몽구 회장 체제로의 전환은 거꾸로 '고려대의 수난'으로 이어졌다. 기존의 고대 인맥은 샅샅이 정리됐다. 상당수는 생존을 위해 정세영 회장을 따라 현대산업개발로 옮겨갔다.

기업도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람이 모인 곳. 학연, 지연 또는 비슷한 근무이력(履歷)에 따른 인맥이 없을 수 없다.

▽'인맥'과 '파벌'= 2001년 지방의 유력 A은행은 조직·인사관리 개선을 위한 내부검토를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지역의 양대 상고(商高)출신으로 이뤄진 파벌. 이것을 놔두고는 건강하고 생산적인 조직의 구축이 힘들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은행경영진은 조직수술을 못했다. 강고하게 뿌리내린 파벌을 성공적으로 걷어낼 가능성이 높지 않은 상황에서, 파벌의 존재를 공식화하는 부작용만 낳을 것을 우려한 것.

삼성그룹에서는 동창회 향우회 등 학연 지연으로 엮이는 소모임을 금지하고 있다. 인맥의 가장 나쁜 형태인 '파벌'의 형성을 막기 위해서다.

삼성그룹 이순동(李淳東) 부사장은 인맥을 '패거리문화'로 규정하면서 "조직에 패거리문화가 기생하면 효율은 기대할 수 없다. 인맥배제는 삼성의 인사원칙"이라고 잘라 말했다.

파벌에 대한 거부감은 현대차, LG 등 주요 그룹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우리 그룹엔 인맥이란 게 없다. 첫째도 능력, 둘째도 능력이다"고 말한다.

▽인맥에 대한 이중적 태도="당신이 무얼 알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굴 알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인맥을 중시하는 비즈니스 세계의 격언이다.

사실 기업은 인맥과 관련해 아주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파벌 형성을 막으려고 무척 애쓰지만, 외부적으로는 딴판이다. 임직원 중 누가 정관계 주요 인사에 선(線)을 댈 수 있는지 매우 알고 싶어 한다. 적극적으로 사내외의 활용 가능한 인맥을 파악하곤 한다. 삼성그룹의 외부인사에 대한 방대하고도 정교한 데이터베이스 축적은 꽤 널리 알려져 있다.

T사의 C모 인사부장은 "외부에서 직원들의 출신지나 학교에 대한 정보를 은밀히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놨다.

선진국에서는 훨씬 체계적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스포크소프트웨어사는 6월부터 7개사 3200여명의 임직원을 상대로 e메일 상대나 전자캘린더의 약속내용 등을 수시로 검색해 '인맥지도'를 그려주는 일을 대행하고 있다. 직원의 인맥지도를 기업의 자산으로 삼으려는 회사가 워낙 많기 때문에 생겨난 서비스다. 비슷한 소프트웨어 시제품을 내놓은 회사도 여럿 있다. 인맥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경영학에서도 '인간관계 관리'라는 분야가 생겨났다.

▽일 중심의 인맥이라면?= 인맥의 존재를 극력 부인하는 삼성그룹에서도 '비서실과 재무팀' 인맥이 잘 나간다. 올 초 있었던 삼성그룹 부회장 및 사장단 인사에서도 승진자 9명중 5명이 비서실 출신.

인맥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인맥 형성 자체를 막기는 매우 힘들다. 특히 일을 통해 형성되는 구성원간의 두터운 신뢰는 조직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이 된다. 학연 지연 등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인맥이 지배하느냐, 일을 통해 형성된 상호신뢰와 이력 등 공개적이고 합리적인 요소가 중시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우일렉트로닉스 이승창 전무(전략기획부문장)는 "일과 능력 중심의 인맥형성은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전설적인 최고경영자 잭 웰치 전 회장은 능력은 있는데 의기소침해 하는 한 후배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당신의 상사가 당신이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줄'을 바꾸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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