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28년째 이란 현장 지키는 최경보씨 "부모님 임종못해 恨"

  • 입력 2003년 5월 18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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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째 이란에 살며 현지 진출 한국 기업들의 해결사 노릇을 해 온 최경보씨. -부시르(이란)=고기정기자
28년째 이란에 살며 현지 진출 한국 기업들의 해결사 노릇을 해 온 최경보씨. -부시르(이란)=고기정기자
28년째 이란의 소도시 부시르에서 살아온 한국인 최경보씨(65). 7일 취재차 찾아간 부시르의 현대건설 사무실에서 마주친 그를, 현지 한국인들은 모두 ‘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현대건설 현지 채용직원에 불과한 그가 이토록 호칭에서부터 대접받는 이유는 뭘까. 현지 한국인들은 “그는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만능 해결사 노릇을 해 주는 보배 같은 존재”라고 소개했다.

최씨는 1975년 건설회사 직원으로 이란 부시르에 와 28년째 살고 있다. 신화건설 대림산업 등 중동에 진출한 적이 있거나 진출해 있는 한국 건설회사 대부분이 그를 거쳐 갔다.

‘거쳐 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은 최씨가 건설회사를 필요로 했다기보다는 건설회사들이 그를 원했기 때문.

그는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유창한 이란어를 구사할뿐더러 탄탄한 현지 인맥도 갖고 있다. 그 덕분에 한국 건설회사들의 협상 창구 역할을 한다. 건설회사의 특성상 ‘맨투맨’으로 풀어야 할 정부 업무를 도맡고 있는 것이다.

건설 관련 인허가나 한국 근로자 출입국 처리 등 자잘한 문제에서부터 원자재 구입 협상 등 굵직한 사안까지 그가 거들면 술술 풀린다.

이런 최씨가 28년째 이란에 머물게 된 건 79년 있었던 이슬람 혁명 때문이었다. 그는 혁명 직전 현지 여인과 결혼했다. 곧이어 터진 혁명과 외국인들의 탈출 러시. 그도 이란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임신한 아내만을 남겨 놓을 수는 없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현지인 부인과 함께 출국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이란에 머문 채 혁명 직후의 혼란과 80년부터 벌어진 이라크와의 8년 전쟁을 겪어야 했다. 극도의 빈곤과 불안정한 수입도 그가 떠안아야 할 짐이었다. 외국 기업이 빠져나간 뒤 이방인이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 같았고, 서방 세계 사람을 적대시하는 분위기 탓에 간첩으로 의심받는 일까지 겪어야 했다. 이런 와중에도 딸 4명이 차례차례 태어났다.

하지만 정작 최씨를 힘들게 한 건 한국에 있는 유일한 피붙이인 누님을 통해 들려온 부모님의 사망소식이었다. “외아들인 제가 이란에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한사코 말렸습니다. 딱 3년만 일하면 집 한 채 살 수 있다며 왔는데…. 저 없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천하의 불효를 저지른 셈입니다.”

환갑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씨는 부모님 묘소에 못 가보았다. 당장이라도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싶지만 생활비를 감당하기도 버거운 상태다. 현지인 수준으로 받는 임금으로는 여비 마련은 엄두도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큰딸 나나(24)가 결혼을 할 만큼 커버려 이란 생활을 정리하기도 여의치 않다.

“이젠 한국인들이 많이 들어와 있어 전처럼 외롭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부모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회한은 여전합니다.”

부시르(이란)=고기정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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