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後중동 건설특수]대형공사 잇단 발주…다국적기업 각축

  • 입력 2003년 5월 12일 17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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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熱砂)의 태양은 인간이 이름붙인 계절을 비웃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자동차를 타고 남쪽으로 7시간을 달려 도착한 이곳 ‘사우스파(South Pars)’. 5월 초순인데도 수은주는 벌써 섭씨 40도를 넘어섰다.

뇌를 익혀 버릴 것 같은 열기와 온몸을 칭칭 감는 불쾌한 습기. 한때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었던 이곳은 ‘달러박스’로 변해 있었다.

이란 최대의 가스플랜트 산업단지. 한국 기업이 일궈내고 있는 ‘역사(役事)’의 현장이다.

이라크전쟁 이후 중동은 건설 특수를 노린 각국 기업들의 진출과 신규 발주 공사 증가로 제2의 중동 붐을 예고하고 있다. 현대건설에서 일하는 이란인 마지드 코나미가 가스플랜트시설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사우스파(이란)=고기정기자

여기서 만난 이란인 마지드 코나미(48)는 현대건설이 채용한 현지인. 고약스러운 땀방울이 안전모 밑으로 쉼 없이 흐르는데도 그는 즐거운 모양이다.

“중동(中東)이 변하고 있습니다. 제 꿈을 이룰 날도 얼마 안 남았어요.”

그가 말한 중동의 변화는 정확히 말해 이라크전쟁 이후부터 시작된 희망의 조짐이다. 이란은 물론 인근 국가들도 앞다퉈 대형공사를 발주하고 있다. 서방 기업들의 중동 진출도 눈에 띄게 활발하다.

그는 오래 전부터 부인과 자녀들이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서 살도록 했다. 미국 이민을 위해서다. 일자리가 느는 만큼 수입도 늘 것을 기대하고 있다. 미국행도 그만큼 빨라진다.

“이슬람 이데올로기가 잠식당하는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제 미래가 중요하니까요.”

코나미씨는 중동의 변화와 그의 꿈을 정확히 일치시키고 있었다.

▽중동의 ‘전후(戰後)’=이라크전쟁이 끝난 뒤 중동은 이미 다국적 자본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특히 건설특수(特需)가 예상되면서 각국이 잰걸음을 하고 있다.

이라크 복구사업은 물론 ‘전쟁 리스크’가 해소되면서 중동 국가들이 그간 미뤘던 각종 공사를 서둘러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상반기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범(汎)중동권에서 발주될 공사는 3500억달러 규모.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리비아에서 발전·담수화 프로젝트 공사가 기다리고 있다.

또 리비아 대수로공사 4단계 입찰이 8월로 예정돼 있고 카타르 아시아경기대회와 관련한 대형 토목공사도 조만간 나올 전망이다. 올 해 말에는 20억달러 규모의 이란 사우스파 가스플랜트 11, 12단계 공사도 시공사가 결정된다.

이를 반영하듯 다국적 기업의 중동 공략도 활발하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영국 재계가 이라크 재건사업에서 최소 20%의 물량을 보장받기를 원한다고 보도했다.

존 하워드 호주 총리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관방장관 등 각국 장관들도 공공연히 이라크 재건사업에 참여할 뜻을 내비치고 있다. 중국은 이미 이라크와 16억달러 규모의 수출에 합의했다.

이들 국가는 이라크 외 주변국 공사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라크전쟁이 끝난 뒤 ‘제2의 전쟁’을 향한 포문이 열린 셈이다.

▽한국 기업의 현주소=1991년 2월 걸프전 종전(終戰) 이후 한국 건설회사가 수주한 쿠웨이트 복구사업 규모는 840만달러어치. 당시 총 사업규모는 200억달러. 우리 업체가 챙긴 몫은 0.004%에 불과했다.

91년 쿠웨이트를 뺀 중동 국가에서 수주한 공사(8억7000만달러)도 90년의 15%에 그친다.

실적이 저조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 기업의 강점이 토목·건축에만 제한됐기 때문. 당시 수요가 많았던 석유화학플랜트 분야는 우리 업체들로서는 무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현지 한국 기업들은 주장한다. 플랜트 공사가 전체 수주 물량 가운데 70%를 넘는 데다 대부분 한국 건설회사의 역량이 중동에 집중돼 있기 때문.

윤호철(尹浩喆) 현대건설 이란 담당 전무는 “95년 이후 한국 건설회사들의 주력 수주상품이 플랜트로 옮겨왔다”며 “중동 지역 수주 물량이 전체 해외 수주량의 절반을 웃돌 만큼 이 지역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올해 초부터 이달 12일까지 한국 기업이 수주한 해외공사 가운데 중동지역 물량은 72%에 이른다.

▽세일즈 외교 절실=중동특수는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해당된다. ‘특수’가 현실이 될지, 가능성에 그칠지는 각자 역량에 달린 것.

이 때문에 현지 한국 기업들이 지적하는 대응방안은 국가 차원의 지원으로 요약된다. 이미 각국 정상들이 중동 건설시장을 언급하고 있듯 한국도 국가적 접근이 필요하다.

윤호철 전무는 “최근 윤진식(尹鎭植) 산업자원부 장관이 중동을 들를 정도로 이 지역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며 “건설사 보증 확대 등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기업들의 기술력 개발도 급선무다. 그간 해외건설이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보다 저가입찰과 무리한 공사 수행 때문이었다. 미국이나 프랑스 등 외국기업의 하도급 업체에 불과한 지금과 같은 사업구조에서는 이 같은 악순환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당장 설계 등 고부가가치 부문을 육성하면서 파이낸싱 등 비(非)시공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기정 기자=이란 사우스파 르포 koh@donga.com

▼현대건설 권탄걸 두바이지사장 ▼

“자존심이요? 10억원짜리 공사라도 무조건 따놓고 봐야지요.”

수천억원 규모라면 모를까 고작 10억원이라니. 하지만 중동지역 수주영업 전문가인 권탄걸(權坦傑·57·사진) 현대건설 두바이 지사장은 단호했다. 이것저것 재보고 공사를 딸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은 무엇보다 실적을 쌓는 게 중요합니다. 공사 규모가 작더라도 실적만 인정되면 나중엔 ‘대어’를 낚을 수 있지요.”

권 지사장이 말하는 ‘대어’는 이라크 복구사업이다. 미국이 독식할 것으로 보이는 복구사업에 참여하려면 우선 소규모 공사부터 차근차근 수행해 기술력과 관리능력을 검증받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특히 미국이 반미 정서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라크 인근 국가에 토목 및 건축공사의 하청을 맡길 경우 한국은 외톨이가 될 가능성도 높다.

이 때문에 권 지사장은 미군 발주 공사를 탐색하는 데 여념이 없다. 당분간 이라크가 미군정체제로 들어설 것인 만큼 군과의 네트워크를 갖춘 뒤 장기적인 수주 발판을 마련한다는 전략이다.

“현대건설은 이라크에서 40억달러가 넘는 공사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착실하게 준비를 한다면 복구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는 많은 편입니다.”

반면 그는 중동 특수(特需) 가능성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이라크전쟁 이후 쿠웨이트 및 오만 등지에서 신규 발주 공사가 늘어나고 있지만 한국 기업에 돌아올 수 있는 몫은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

“한국 건설회사들이 나름대로 경쟁력을 갖췄다고는 하지만 대규모 자본과 기술력을 앞세운 선진국 업체들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일부 한국 기업은 입찰자격도 못 얻는 경우도 있지요.” ‘전후 특수’에 열광하기 보다는 내실 있는 준비와 전략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고기정기자=이란 사우스파 르포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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