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김주영/재벌총수 지급보증 부작용 더 크다

  • 입력 2003년 5월 4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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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총수들에게 그룹사의 채무에 천문학적 액수의 보증을 서도록 하는 전근대적인 관행이 여전히 남아 있다. 최태원 SK 회장은 SK글로벌에만 2조원의 지급보증을 서 있다. 최 회장이 SK글로벌 사태 이후 담보로 제공한 본인 소유의 상장·비상장 주식의 총 가치가 4000억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 회장은 전 재산의 다섯 배 이상의 보증책임을 지고 있는 셈이다. 채권단은 “총수의 보증을 요구하는 것이 책임경영을 하도록 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재벌총수의 지급보증은 채권단의 도덕적 해이를 낳고 기업구조 개혁을 가로막는 각종 폐해의 주범이다.

첫째, 재벌총수의 보증은 재벌그룹의 선단식 경영 및 부당 내부거래를 조장해 부실기업의 퇴출을 막는다. 이번 SK그룹의 재무위기를 가져온 원인(遠因) 중 하나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직후 부실금융기관이었던 SK증권을 무리하게 살린 것을 들 수 있다. SK증권은 극심한 누적적자로 자본이 잠식되어 결국 98년 8월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됐다. 한데 SK그룹 계열사들이 97년 말부터 98년도에 걸쳐 2조원 이상을 지원해 가까스로 살려냈다. 왜 SK그룹은 무리를 해가며 SK증권을 살렸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최종현 회장이 SK증권에 지급보증을 섰기 때문에 SK증권을 퇴출시킬 경우 최 회장이 그룹 전체의 지배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SK증권의 채권단은 이러한 약점을 잡고 SK 계열사들에 지원하라고 압박했다.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재연되는 것은 아닌지 무척 걱정스럽다. 채권단은 최 회장의 구명탄원을 하면서까지 SK글로벌 사태 해결을 위한 ‘최 회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형국이다.

둘째, 재벌총수의 보증은 총수의 전횡을 가능케 하는 역효과를 낳는다. 우리는 재벌총수가 불과 2∼3%의 지분만을 갖고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비판해 왔다. 그런데 재벌총수는 비록 지분은 2∼3%밖에 안 되지만 전 재산의 몇 배에 해당하는 보증책임을 부담하므로 전문경영인보다 강한 발언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재벌총수의 황제경영을 정당화할 근거를 제공하는 셈이다.

셋째, 채권단의 도덕적 해이를 낳는다. 채권단은 여신을 제공하는 해당기업의 신용을 공정하게 평가해 적절한 수준의 여신을 제공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금융기관들은 재벌총수의 개인보증을 이용해 계열사의 재무상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여신을 제공해 왔다. 여차하면 재벌총수가 그룹사 전체를 동원해 빚을 갚아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험관리를 게을리 하는 채권단의 도덕적 해이를 낳는 것이다.

좋은 기업지배구조란 대주주, 전문경영인, 소액주주, 채권자, 사외이사 등 기업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각 이해관계자가 각자의 지위에 맞는 권한을 행사하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는 구조를 말한다. 소액주주의 권한이 무시되거나 사외이사가 임무를 게을리 하는 것도 문제지만, 대주주에게 투자지분을 넘어선 무제한의 책임을 지우는 것 역시 좋은 기업지배구조에 역행하는 일이다.

김주영 변호사·'좋은 기업지배구조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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