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內債위기 1]재정 악화/"정부가 책임져야 할 부채 총 760조"

  • 입력 2002년 12월 4일 19시 03분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 곳간이 비어서 다시 경제위기에 빠질 수 있다.”

“일반 회계만 보면 국가재정이 건전한 것 같지만 일종의 착시(錯視)다. 지금이라도 공적연금 등을 감안한 실제 부채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없이는 재정이 위험한 상태까지 갈 수 있다.”

재정위기에 대한 경고음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다. 위기의식 없이 안이하게 대처했다가는 재정이 국가경제의 발목을 잡는 최대의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게다가 최근 국내외 경제상황이 극히 불투명하고 금융시스템 정비나 기업 국제경쟁력이란 측면에서도 만족할 수준은 못 된다. 여기에 재정마저 흔들린다면 상황이 악화됐을 때 기댈 수 있는 ‘방패막이’가 없어진다는 점이 걱정이다.》

▽실제와 차이 많은 ‘공식 국가채무’〓재정경제부가 발표한 ‘2001년 말 국가채권 및 채무현황’을 보면 ‘공식적인’ 국가채무는 122조1000억원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채무만 합친 금액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22.4% 수준. 선진국들의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GDP 대비 국가채무 평균이 72.7%라는 점을 보면 한국의 재정상태는 건전하다고 정부측은 주장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정은 그리 좋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우선 국제 통계기준부터가 모호하다. 외국의 경우 공무원연금이나 군인연금처럼 정부가 직접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은 대체로 국가채무에 포함시키고 있으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 또 내년부터 국가채무에 잡히기 시작할 ‘회수불가능 공적자금’ 69조원(정부 추정)도 기존의 국가채무에는 빠져 있다.

가립회계법인 박개성(朴介成) 대표는 “OECD 통계기준은 국가채무에 연금채무를 포함하고 있다”며 “한국의 공식적인 재정상황 지표가 다른 선진국보다 좋게 나오는 것은 일종의 분식(粉飾)회계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직접 책임져야 하는 부채를 포함하면 적어도 760조원은 된다고 주장한다.

또 한양대 나성린(羅城麟) 교수는 “정부 공식통계에 따르더라도 앞으로 매년 정부가 갚아야 할 이자만 15조원이고 이는 매년 예산수입의 10%를 넘는다”며 “교육 등 기본투자에도 돈이 모자라는 정부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또 하나의 복병, 공적연금 부실〓한국사회보험연구소장인 순천향대 김용하(金龍夏) 교수가 최근 발표한 ‘공적연금의 재정평가와 향후 정책방향’ 보고서에는 공적연금의 심각한 재정악화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은 이미 기금이 고갈된 상태. 공무원연금에서는 2010년에 모두 5조5277억원의 적자가 생길 전망이다. 군인연금은 2009년에 8933억원의 적자가 발생한다. 정부가 관리하는 사학연금도 2020년이면 지출이 수입보다 많아지고 2029년이면 기금이 바닥날 전망이다.

1988년에 처음 시작한 국민연금은 이대로 가다가는 2034년부터 적자로 돌아서고 2048년에는 기금이 완전히 고갈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김 교수는 “국민연금이 국가채무인지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외국처럼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은 무조건 국가채무에 포함시켜야 한다”며 “모두가 정부가 세금을 거둬 메워야 할 사실상 재정부담”이라고 설명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최근 내놓은 보고서에서 이대로 가면 공적연금의 부실은 피할 수 없고 공무원연금 적자만 2030년이면 200여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차기 정부는 ‘인기 없는 정책’ 각오해야〓대통령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장과 복지의 균형발전을 공약으로 내놓고 있다. 말로는 재정 건전화도 주장한다. 하지만 한번 나빠진 재정을 되살리려면 국민의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사실은 흔히 잊혀지고 있다.

특히 나라살림에 아랑곳없이 일시적으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 정책은 재정을 완전히 파탄시킬 수 있다. 경제위기가 끊이지 않는 일부 남미 국가와, 90년대 미봉책으로 전체 경쟁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재정지출을 했다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본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한국금융연구원 박종규(朴宗奎) 연구위원은 “앞으로 엄청난 재정위기가 닥칠 것이 명백하더라도 정치적 리더십이 없이는 이런 위기가 현실로 닥칠 때까지 그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며 “현 정부 및 차기 정부는 인기가 없더라도 정부 지출은 줄이고 세수(稅收)를 늘려 재정을 건전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IMF 단골' 중남미 국가들 환란반복▼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들은 잦은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단골 신청국’이다.

이들 국가는 97년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과는 위기의 발생 원인이나 그 이후 진행 과정이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한국이 경제 운영을 제대로 못할 경우 어떻게 될 수 있는지, 앞으로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할 부분이 어딘지,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산하 국제경제조사연구소가 최근 대외비로 펴낸 ‘중남미 환란(換亂) 왜 반복되나?’라는 보고서에는 이들 국가의 위기 원인을 주로 내부적 요인에서 찾고 이를 5가지로 요약했다.

이 보고서가 꼽은 환란 재발의 원인 가운데 첫 번째가 ‘부진한 경제개혁’. 그중에서도 과도한 재정 지출에 따른 ‘빚투성이 정부’가 환란의 주범이라고 지적했다.

새 정권은 경제 회생을 위해 여러 차례 재정 개혁을 추진하지만 공무원 공기업 노조 등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들의 반발 때문에 번번이 무산됐다.

이처럼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데는 인기영합적인 ‘포퓰리즘’ 정치문화에도 적잖은 원인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 밖에 보고서는 △선진국 환상 △정치논리의 경제간섭 △정부의 부패 △국제금융시장의 투기장화 등을 남미 국가의 주기적인 경제 위기 원인으로 꼽았다.

또 한국도 정경유착 등 부패가 사라지지 않고 있고 개방화로 외국인 투자의 비중이 적지 않은 점을 고려할 때 꾸준한 재정 개혁과 시장논리 확립이 외환위기 재발을 막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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