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24시/별을단 임원님③]매년 평가 “언제 잘릴지…”

  • 입력 2002년 3월 6일 18시 41분


“임원이 되면 만사형통일 줄 알았는데 막상 그 자리에 오르고 보니 날마다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언제든 그만두라면 짐을 싸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워 물게 된다.”

주류업체의 A상무는 “임원이 되는 날로 정년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고 말한다. 명절 때면 일가 친척들이 보내는 선망의 시선에 뿌듯한 마음도 들지만 이것도 잠시. 임원 승진 후 3, 4년도 채 안 돼 옷을 벗은 동료나 선배를 떠올리면 은퇴를 대비해야 할 때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직장인 24시 연재기사 보기

내로라 하는 대기업의 B상무는 올해 보직이 바뀐 이후 조직 장악에 애를 먹고 있다. 고참 부장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아서다. 언제부터인가 고참 부장들 사이에는 ‘임원은 임시직이므로 회사를 나가도 임원이 먼저 나간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그는 “솔직히 나도 부장 때 그랬다”며 “솔선수범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씁쓸해했다.

임원들은 예전 같지 않은 건강상태에도 불안을 느낀다. 몇 년 전 임원승진 때문에 암에 걸린 사실을 쉬쉬하다 숨진 어느 기업 부장의 얘기가 남의 일 같지 않다. 해마다 받는 건강검진도 전혀 달갑지 않다. 부하 직원들은 “대장검사다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이다 해서 몇 백만원짜리 검사를 받아서 좋겠다”고 하지만 임원들의 눈에는 ‘회사 밖으로 쫓아낼 구실을 찾기 위한 테스트’로 비친다.

“건강진단이 두렵다. 혹시 재검 판정이라도 나올까봐 건강진단 철이 되면 몇 주 전부터 몸 관리에 돌입한다.” 올 들어 체력 문제로 보약을 먹기 시작했다는 전자업체의 C이사. 요즘 들어 부쩍 술자리가 부담스러워진 그는 양주를 물 컵에 섞어 마시다가 적당히 기회를 봐서 버리는 주법(酒法)을 애용하고 있다.

이동통신업체의 D상무는 얼마 전 불쑥 사표를 던져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장의 신임도 두터워 이른바 ‘잘 나가는 임원’의 한 사람이었던 그가 회사를 그만둔 것은 정점(頂點)에 있을 때 새 길을 찾겠다는 판단 때문. 그는 “현 위치에서 안주하느니 한 등급 낮은 회사로 옮겨 최고경영자(CEO) 경험을 빨리 쌓는 것이 경력관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매년 실적을 평가받는 임원이 되면서 자신과의 싸움이 더욱 치열해졌다. 과장 부장 시절 임원들 방에 가면 혼자 창 밖을 바라보는 모습을 많이 봤는데 요즘의 내가 꼭 그렇다.” ‘10년 말술’로 대장질환에 시달리는 E이사는 올 들어 1년짜리 주말반 경영학석사(MBA) 과정에 매달리고 있다. 학위가 탐나서라기보다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속의 불안감을 달랠 방법이 없어서다.

김태한기자 freewill@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