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경영스타일]고비마다 '불도저 경영'

  • 입력 2001년 3월 22일 01시 28분


포니와 함께
포니와 함께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전 명예회장은 맨몸으로 국내 최대 기업을 일군 만큼 ‘불도저 같은 저력으로 신화를 창조한 마술사’로 불렸다.

그는 평소 “나는 현대를 통해서 기업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냈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 모든 일을 해내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많았고 산 모퉁이를 돌 때마다 하나의 신화가 탄생하곤 했다.

▽신화의 시작 아도서비스〓새로운 사업을 궁리하던 정주영은 1940년 동업자 두 사람과 함께 사채를 얻어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를 인수했다. 그러나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공장은 잔금을 치른 지 닷새만에 정주영의 실수로 불이나 잿더미가 돼버렸다.

겨우 목숨만 구한 정주영은 공장뿐만 아니라 고객이 맡겨놓은 자동차까지 태워버려 빚더미에 올라앉고 말았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던 그는 또 사채를 빌려 자동차 수리공장을 재개했다. 신설동 빈터에 무허가로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남들보다 빨리 고치고 수리비를 비싸게 받는 식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악몽의 고령교 공사〓대구와 거창을 잇는 고령교가 6·25 전쟁통에 파손되자 정부는 1953년 이를 복구하기로 했고 전쟁전에 현대건설을 세웠던 정주영은 이를 맡았다.

그러나 이 공사는 정주영에게 골칫덩어리로 변하고 말았다. 계절에 따라 다른 낙동강 수심과 열악한 장비시설, 예기치 않은 홍수 등이 공사를 방해했다.

가족과 동료들은 공사를 중단하자고 했으나 정주영은 ‘사업에는 신용이 최우선’이라는 신념으로 형제들의 집을 팔고 얻을 수 있는 빚은 모두 얻어 1955년 결국 계약한 기한보다 2개월 늦게 공사를 완공했다. 계약금액이 5478만환이었고 적자는 6500만환이었다.

이로 인해 정부로부터 크게 신뢰를 얻었기 때문에 현대건설이 정부공사를 대부분 수주하는 계기가 됐다.

▽살 길은 해외, 태국진출〓국내 정치상황이 급변동하면서 세무조사 등의 곤욕을 치른 정주영은 해외에서 활로를 찾았다. 그 첫 성과가 1965년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 낸 것이다. 선진 16개국 29개 업체와 겨뤄 따낸 이 공사는 공사계약금이 국내외 공사 전체 계약액의 60%가 넘을 정도로 규모가 큰 것이었다.

역시 시련이 닥쳤다. 태국의 엄청난 비와 나쁜 토질, 기술의 낙후성 등 때문에 공사는 진척이 안됐고 현대건설은 또 다시 큰 손해를 입고 말았다.

그러나 이 공사에서 돈은 잃었지만 고속도로 공사의 경험이 나중에 경부고속도로를 수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베트남 캄란만 준설공사 등을 거치면서 현대건설은 해외진출을 확장했고 나중에 ‘중동특수’를 일궈낼 바탕이 됐다.

▽중동신화의 서막 주베일 항만공사〓1976년 사우디아라비아가 발주한 주베일 항만공사는 공사금액만 당시 우리나라 예산액의 절반에 맞먹는 9억3000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4600억원)로 세계 건설업계가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불렀던 일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9억3114만달러로 낙찰 받았다.

공사를 진행해가던 정주영은 또 하나 아이디어를 구상해냈다. 모든 기자재와 콘크리트 슬래브를 울산 조선소에서 제작해 세계 최대 태풍권인 필리핀 해양을 지나 걸프만까지 대형 바지선으로 운반하는 것이었다. 오일쇼크로 침체돼있던 울산조선소에도 일거리를 주고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내놓은 극약처방이었다. 그리고 19번에 걸쳐 이 거대한 바지선 운반작업은 시행됐다.

이처럼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낸 뒤 현대건설은 쿠웨이트 슈아이바항 확장공사, 두바이 발전소 등 중동일대 대형 공사를 잇따라 수주하게 됐다. 1975년 중동 진출 뒤 1979년까지 현대는 약 51억64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하임숙기자>arteme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