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보는 경제전망]"내년엔 허리띠 더 바짝"

  • 입력 2000년 10월 26일 19시 37분


“내년은 올해보다 훨씬 좋지 않다. 성장률은 떨어지고 물가는 오른다. 고유가도 계속된다. 따라서 계열사별 총 투자규모를 현금 수입의 80% 이내에서 억제하라.”

삼성 핵심계열사 임원 A씨는 최근 그룹으로부터 “내년 투자계획을 짤 때 참고하라”는 설명과 함께 이런 지침을 받았다. 그는 ‘올해 사상 최대의 순이익을 낸 덕택에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어놓았다면 내년에는 다시 바짝 졸라매라’는 메시지로 해석했다.

A씨의 눈길을 끈 것은 그룹이 작성한 내년 경제지표 전망치가 현 상황을 토대로 한 평시 시나리오와 더 나빠질 것을 가정한 비상 시나리오 등 두 종류로 마련됐다는 점. “요즘 경제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정도라더니 그룹 수뇌부조차 미래를 예측하는데 어려움을 겪는구나”하는 생각에 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룹마다 비관적 전망〓LG그룹 임원 B씨도 A씨와 비슷한 심정. 구본무 회장이 17일 임원 세미나에 이례적으로 참석, 간곡하게 당부한 말이 계속 귓전에 남아있다.

구회장은 “최근 주식시장 침체와 유가상승, 금융경색 등이 겹쳐 심각한 위기로 이어질까 걱정”이라며 “우선 당장은 비용절감에 주력하고 불요불급한 투자를 철저히 억제하라”고 지시했다.

주요 그룹들이 이처럼 바짝 긴장하는 이유는 자체적으로 파악한 내년 경제전망이 잿빛 일색이기 때문. 삼성은 비관적인 시나리오에서 △성장률 4.2% △원달러 환율 1115원 △금리(3년만기 회사채) 10% △유가(두바이산) 배럴당 30달러를 가정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각종 악재가 겹칠 경우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경계의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삼성이 꼽는 4대 악재는 △미국경기의 연착륙 실패 △반도체 공급과잉에 따른 가격폭락 △금융 및 기업구조조정 지연 △배럴당 30달러이상의 고유가. 삼성 관계자는 “이런 악재가 겹치면 내수경기와 수출이 동시에 침체돼 금융경색이 생기고 이는 외국인 투자자금의 대거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최악의 경우 환율을 1400원대로 설정한 시나리오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리띠를 졸라매자”〓삼성은 일부 핵심사업을 제외하고는 각 계열사의 투자규모가 사내유보(세후순이익+감가상각액+각종 충당금) 대비 80%를 넘어서는 안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는 작년 이맘때 2000년 투자규모를 ‘내부유보의 100%’로 정한 것보다 20% 줄인 수치. 비상상황에 대비해 현금을 넉넉히 확보하라는 것이다.

각 계열사는 이 기준에 따라 다음달초까지 매출 투자 고용 등 내년 계획을 제출할 예정이지만 그룹 차원의 심의과정에서 한차례 더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 삼성 관계자는 “투자액을 내부유보의 80%로 정한 것은 평균 개념일 뿐”이라며 “적자를 내거나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은 이보다 더 줄여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력증원도 반도체 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휴대전화 등 핵심사업에 한해 허용할 계획이다.

LG는 한계사업에서 과감히 철수하고 인력과 재원을 정보통신 바이오 등 그룹의 미래 사업에 쏟아붓는다는 계획. SK도 긴축기조를 유지하면서 신규투자는 벤처 생명과학 정보통신 등 핵심부문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바야흐로 ‘긴축 보수 현금위주 경영’이 재계의 새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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