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출기업 판정기준 발표]재계 "당국의 일방적 기준"

  • 입력 2000년 10월 5일 18시 44분


“거창하게 떠벌려야만 개혁이 되는가. 퇴출대상을 둘러싸고 떠도는 갖가지 뜬소문 때문에 멀쩡한 기업까지 골병이 들 지경이다.”(중견 A그룹 임원)

금융감독위원회가 5일 퇴출기업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데 대해 재계가 “정부의 미숙한 일처리로 기업들이 또 한번 상처를 입었다”며 반발하고 있다. 기업 구조조정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명분에 밀려 공식 반응은 애써 삼가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강한 불만을 토로하는 분위기.

전국경제인연합회 손병두 부회장은 “개혁은 원칙에 입각해 소리없이 ‘일상적으로’ 하면 되는 것”이라며 “기업 개혁을 이벤트처럼 다루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책임없나〓전경련 관계자는 “채권은행을 뒷전에 제쳐둔 채 감독당국이 퇴출기준을 정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지적했다. 기업의 부실 여부에 대한 판정은 채권단을 포함한 시장의 고유권한인데 은행을 못 믿겠다는 이유로 금감위가 나서기 시작하면 시장은 사사건건 정부 눈치만을 보게 된다는 것.

또 다른 관계자는 “자녀가 공부를 못하니까 부모가 숙제를 대신 해주겠다고 나선 꼴”이라며 “이런 사례가 되풀이되면 정작 필요할 때 시장이 힘을 쓰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B그룹 임원은 “채권단이 은행의 추가손실을 염려해 부실기업 판정에 소극적이라면 이는 정부가 금융 감독권을 발동해 응분의 조치를 취하면 될 일”이라며 “감독을 소홀히 한 것은 반성하지 않고 금융기관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만 꾸짖어서는 곤란하다”고 정부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정부가 부실기업을 퇴출시킬 것이라는 얘기가 추석 연휴를 전후해 떠돌았는데 후속대책이 늦어지는 바람에 기업의 자금난이 심화됐다는 볼멘소리도 터져 나온다.

▽기업활동 위축하지 말아야〓재계도 회생 가능성이 없는 부실기업의 퇴출은 경제체질 강화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입장. 다만 이번 발표가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저해하거나 구조조정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역효과를 내지 않도록 최종 선정과정에서 채권단의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주문하고 있다.

실제로 부실심사 대상으로 거명되는 모 기업은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추진중인 자산매각 협상 때 상대방의 가격 후려치기로 인해 제값을 받지 못하지나 않을까 고심하는 실정. 재계는 특히 정부의 압력을 의식한 채권단이 ‘건수 채우기식’으로 퇴출기업 선정을 진행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황인학 산업연구실장은 “퇴출기업을 정할 때 부채비율이나 이자보상배율도 물론 중요하지만 업종별 시장환경과 미래 성장성 등 동태적인 변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계는 정부가 기업 전체에 대해 ‘선전포고’하듯이 퇴출요건을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채권단을 윽박지르는 듯한 방식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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