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오른 재벌해체上]"이대로는 미래없다" 궁지몰린 '황제경영'

  • 입력 2000년 6월 1일 19시 30분


“이제는 세계적 흐름과 여건으로 볼 때 독자적인 전문경영인 체제로 경영하는 게 국제경쟁에서 성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정주영(鄭周永)현대명예회장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순간 재벌들이 느꼈을 경악감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재벌비판론자들에게서나 들을 수 있었던 말이 대표적인 재벌총수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재벌체제가 이젠 내부로부터도 ‘효용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현대 3부자’의 동반 퇴진은 그런 의미에서 재벌체제의 핵심인 ‘총수 일가에 의한 기업 지배구조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진다.

삼성 LG SK 등 다른 재벌들도 이 충격으로부터 비켜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주요 재벌들은 “현대와 우리는 다르다”고 강변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오너지배 체제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보고 ‘정중동(靜中動)’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다르다?”〓현대의 특수한 사정을 확대 해석하지 말아달라는 게 다른 재벌들의 주문이지만 현대의 발표가 상당한 부담감을 안겨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 재계 임원은 “특히 오너 1인 지배체제가 굳어진 재벌일수록 잔뜩 긴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삼성 LG SK 등은 현대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지배구조 개선이 이뤄진 그룹들. 그러나 정주영 명예회장의 폭탄선언으로 개혁의 속도와 폭에서 훨씬 심한 압박을 받게 됐다.

이들 그룹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확고한 오너체제라는 점에서는 현대와 별로 다를 게 없다. 삼성의 경우 총수인 이건희회장이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 대표이사직과 삼성 SDI 등 10여개 상장사의 등기 이사직을 맡고 있다. 이를 통해 모든 계열사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삼성은 특히 아들 재용씨에 대한 변칙상속 의혹을 받으며 상속작업을 해오던 터라 이번 사태가 후계 승계작업에 미칠 영향을 저울질하고 있다.

LG그룹은 구자경 명예회장의 장남인 구본무회장이 LG전자와 LG화학 대표를 맡고 있는 등 구명예회장의 2세들이 경영의 전면에 포진해 있다.

특히 구본무회장의 비상장 계열사 주식 고가매입 의혹을 받고 있어 당혹감이 더욱 크다.

SK는 4대 그룹 중 오너의 지분율이 적고 지분 분산이 잘 돼 있는 편.

외형상으로 전문경영인인 손길승회장이 그룹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실질적으로는 고 최종현 회장의 장남 태원씨가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

현대 3부자의 퇴진은 현재의 지배구조를 유지, 혹은 2세에게 승계 하려던 이들 그룹의 구상에 변화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오너체제뿐만 아니라 하반기에는 재벌개혁의 강도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게 기업들의 우려. 법무부가 기업 지배구조개선을 위한 용역을 맡겨놓은 상태이며 결과물이 나오는 대로 재경부 등과 함께 재벌개혁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도록 법률을 손질할 예정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외부의 충격에 의한 재벌개혁이었다면 앞으로는 내부에 의한 고강도 개혁이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경영인체제가 능사는 아니다”〓일률적 지배구조의 강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재벌 오너들은 그동안 사석에서 ‘오너 체제의 장점’을 역설하곤 했다. “자기 재산인 만큼 전문경영인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한다”는 논리다.

손길승회장은 SK가 도입한 ‘오너와 전문경영인간의 파트너십’을 한 모델로 들기도 한다. 손회장은 “기업지배구조에 대해 일률적으로 한 가지를 강요할 게 아니라 오너체제, 파트너십, 전문경영인체제 중 실정에 맞는 걸 선택하면 된다”고 말했다.

다른 그룹 관계자들도 “현대가 이렇게 되니까 다른 그룹까지 마녀사냥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곤란하다”면서 “한국에는 분명 오너의 역할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항변했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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