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자구책 발표]재벌 개혁 가속도 붙나?

  • 입력 2000년 5월 31일 18시 55분


정주영명예회장과 몽구, 몽헌회장 등 3부자의 경영 일선 퇴진은 현 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해온 재벌 개혁의 최대 전리품으로 기록되게 됐다. 최근 들어 지지부진하던 기업 및 금융 개혁도 이번 발표로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 등 정부 관계자들은 현대측 발표를 ‘황제 경영의 종식 선언’으로 규정하면서 우리 경제의 대외 신인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환영했다.이제 관심은 ‘현대 개혁’에 성공한 정부가 다른 그룹의 지배 구조에도 칼날을 들이댈지 여부. 그러나 재경부 관계자는 “이번 결정은 현대측이 시장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내놓은 개별 그룹 차원의 해법”이라며 “모든 그룹의 문제로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라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룹 해체 자초한 현대〓16대 총선이 끝난 직후인 4월말 국세청은 현대 삼성 LG SK 등 4대 재벌에 대한 세무 조사에 전격 착수했다. 비슷한 시기에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들 그룹 계열사의 부당 내부 거래 행위를 조사했고 금융감독원은 금융 계열사를 통한 자금 편법 지원을 문제삼고 나섰다. 정부는 “의례적인 정기 조사일 뿐 특정 기업을 겨냥했거나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지만 시장에서는 당국이 재벌 개혁의 시동을 다시 건 것으로 해석했다.

정부 개입의 빌미가 된 직접적 계기는 3월 몽구 몽헌 형제간에 빚어진 경영권 분쟁이라는 게 대체적 분석. 여론의 비판이 거세지고 재벌 총수와 그 가족의 경영권 전횡에 따른 폐해가 부각되면서 정부는 기업 지배 구조 개선을 요구할 명분을 갖게 됐다. 현대에 대한 시장의 뿌리깊은 불신도 정부의 ‘현대 개혁’ 행보에 든든한 원군 역할을 했다. 이런 와중에 불거진 현대건설 등 일부 계열사의 유동성 위기는 ‘정씨 일가 퇴진’이라는 혁명적 결말을 몰고 온 결정타가 됐다.

▽탄력 받은 재벌 개혁〓정부의 기업 개혁은 부채비율 감축과 지배 구조 개선이라는 양대 축을 중심으로 전개돼 왔다.

부채비율 감축은 그런 대로 성과를 거둬 97년말 470%였던 4대 그룹의 평균 부채비율이 작년 말 174%까지 떨어졌다. 기업 지배 구조 개선도 제도적 장치 측면에서는 나름대로 진전이 있었다. 자산 총액 2조원 이상 기업의 경우 2001년부터 사외 이사 수가 전체 이사의 2분의 1 이상 되도록 하고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원회와 감사위원회를 만들도록 법령이 개정됐다.

그러나 오너 중심의 재벌 그룹 경영 행태는 변화의 조짐이 거의 없었다. 불과 5% 안팎의 지분을 갖고 있는 재벌 총수의 뜻은 그대로 회사 방침이 됐고 경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2세의 경영권 승계도 여전히 당연시됐다.

정부가 가장 우려한 대목은 올해 안에 재벌 개혁을 마무리짓지 못할 경우 대외 신인도와 국가 경쟁력에 치명적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올해 2차 기업 개혁의 목표를 기업 지배 구조의 ‘실질적’ 개선으로 설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다른 재벌로 확대될까〓삼성 LG SK 등 다른 그룹들은 이번 사태의 불똥이 자신들에 튀지 않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부는 일단 현 시점에서 다른 기업의 지배 구조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입장. 기업마다 나름대로 개선 노력을 기울여 왔고 재벌 개혁의 강도를 무리하게 높일 경우 시장에 미칠 부작용도 감안해야 한다는 논리다. 정부의 공식 방침은 재벌 그룹의 지배 구조는 시장에 의해 개혁돼야 한다는 것. 정부는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선에서 그치고 실질적인 개선 작업은 주주와 금융기관 등 기관투자가, 소비자 등 시장 참여자들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현재 법무부가 용역을 발주한 기업지배구조 개선 방안에 주주단독대표 소송권과 집단소송제의 도입이 검토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맥락이다.

어쨌든 재벌 개혁의 주도권이 정부쪽으로 넘어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전문 경영인 체제 도입이 대세인 점을 감안할 때 당분간 재벌 개혁은 여타 재벌 그룹들이 지배 구조 개선에 성의를 표시하는 조치를 취하고 당국은 암묵적인 드라이브를 거는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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