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代해법 너무나 '한국적'…원칙없는 사재출자 강요

  • 입력 2000년 5월 5일 20시 50분


“한국 정부와 기업은 여전히 ‘한국적’, 즉 후진적 경제시스템에 젖어있다.”

정부와 현대가 투신사태를 풀어간 과정을 지켜본 서울주재 한 외국기업인의 ‘관전평’이다. IMF 위기 후 정부와 기업이 ‘투명한 경제’ ‘주주자본주의’ ‘책임의 원칙’을 외쳐댔지만 모두 구두선에 그쳤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정부가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현대가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인 총수일가의 사재출자선언 과정이 경제전문가들의 비판대상이 되고 있다.

원칙만 놓고 따진다면 주식회사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주주들은 출자지분에 상응하는 책임만 지면 된다. 법률상 대주주에게 무한책임을 묻는 것은 주식회사의 원칙을 부정하는 행위. 현대는 이 점을 거론하면서 “총수 일가의 사재출자를 강제하는 것은 사실상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행위”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현대는 이런 주장을 하면서도 현대전자와 현대상선이 보유한 현대정보기술 택배 오토넷 등 비상장사의 주식을 담보로 제공하는 결정을 이사회 의결도 거치지 않고 그룹 구조조정본부가 먼저 발표해 ‘주주중심 경영’이 아직 허울뿐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현대상선은 4일 오후 이사회를 뒤늦게 소집, 담보제공을 허겁지겁 소급 통과시켰고 현대전자는 아직도 이사회를 소집하지 못한 상태.

금융감독위원회측은 “총수의 잘못된 판단으로 회사가 어려움에 처했는데도 책임을 지지 않는 재벌의 행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전경련이나 현대가 난데없이 ‘자본주의의 원칙’을 외치고 나선 것은 말이 안된다”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황제경영’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듯 주주가 경영에 실패한 경영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 우리 대기업의 현실이기 때문에 정부가 주주 대신에 나서 경영자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 한국적 현실이라는 주장.

참여연대측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황제경영으로 인한 책임을 더 물어야 한다”며 총수 일가의 추가 사재출자 및 총수의 민형사상 처벌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증시 관계자들은 “96년 현대가 국민투신을 인수한 것은 현대의 책임이지만 IMF위기 때 현대가 부실한 한남투신을 인수한 것은 정부의 의지가 작용한 만큼 총수의 무한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한 발상”이라는 입장.

현대투신측도 이점을 강조하면서 “한남투신을 인수할 때 정부가 시중금리보다 6% 정도 싼 저리자금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해놓고 시중금리가 떨어진 이후에는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고 이제 와서 현대에 책임을 묻는 것은 약속위반”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법조계는 현대의 주장을 “계약서도 없이 계약위반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반박한다. 또 만약 금리가 더 올라 현대가 초과이익을 얻었다면 현대가 초과이익을 정부에 돌려주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 현대는 계약위반을 주장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정부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도 여전히 심각하다.

현대에 대해서는 엄격히 책임을 물으면서도 정작 부실의 규모가 더 큰 한투와 대투에 공적자금을 투입해놓고 부실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민간기업의 모럴 해저드보다 더 심각하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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