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힘겨루기]재계 『무조건 백기들 수 없다』

  • 입력 1998년 10월 15일 19시 43분


15일 열린 전경련 회장단회의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

첫째, 기업구조조정에 대한 정부의 개입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 점이다. 이날 재벌총수들은 표현은 완곡했지만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정부가 재계의 자율 구조조정안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히 지적했다.

국민의 정부가 기업개혁의 상징적 조치로 간주하고 있는 재벌 구조조정에 대해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지 불과 며칠만에 재계 총수들이 대거 모여 정부의 정책방향을 비판한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이때문에 이날의 움직임을 단순한 정례모임이 아닌 그동안 정부가 재벌에 가해온 일련의 조치들, 이를 테면 기업의 강제퇴출, 공정거래법 강화 등의 연장선상에서 정부권력과 재벌 총자본간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말하자면 재벌 총수들은 정부의 정책방향에 원칙적인 ‘협조’는 하되 재벌의 이익이 현저하게 침해되는 조치에 대해 무조건 ‘백기’를 들 수 없다는 의지를 집약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이다.

둘째, 전경련 회장단에 포함된 총수 가운데 구본무(具本茂)LG회장을 제외한 16명 전원이 회의에 참석한 것도 매우 이례적이다. 올들어 한번도 없었던 일이다.

우연이랄 수도 있겠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재계의 단합된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없지 않다.

실제 재계의 한 인사는 “지금까지 한번도 총수들이 자발적으로 이렇게 모인 적이 없었다”며 “정부의 구조조정 방향에 대한 반발감과 위기의식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했다.

이를 의식한듯 전경련 관계자는 총수들이 최근 여러가지 어려운 경제상황을 의식해 자발적으로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확대해석하지 말아줄 것을 주문.

주요그룹의 한 관계자는 “세계 어떤 대기업간의 합병도 최소한 7,8개월은 걸린다”며 “정부가 의욕만 앞서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재촉하면 오히려 졸속합의가 나올 수 있다”고 정부정책에 대해 강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셋째, 정부가 주도하는 타율적 구조조정으론 국제신뢰도를 높일 수 없다는 의견표명도 상당히 이례적이다. 손병두(孫炳斗) 전경련부회장은 “재계가 자율적으로 하지않을 것이라는 불신감이 팽배해 있는 것이 문제”라며 “그러나 재계는 민간자율로 정한 합의시한인 다음달까지는 결론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산업자원부 고위관계자는 “다음달말까지 5대그룹에 대한 금융기관의 실사작업을 끝낸 후 구조조정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바로 워크아웃에 들어가겠다”며 기존의 입장을 재강조해 추이가 주목되고 있다.

특히 정부는 지금처럼 현대와 LG, 현대와 한국중공업 등 빅딜 해당기업들이 서로를 극도로 불신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자율에 의해 원만한 합의를 도출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실제로 전경련 회장단회의가 끝난 후 현대와 LG가 양사 반도체사업 평가기관을 선정하는 자리에서 양사가 추천기관을 5개씩 적은 봉투를 동시에 내놓고 중복추천되는 기관으로 결정하는 등 불신의 골을 드러내기도 했다.

어쨌든 ‘빅딜의 병목’으로 인식되고 있는 반도체와 발전설비부문에서 파격적인 합의가 나오지 않는 한 정부와 재계간의 이같은 갈등구도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

재계는 가급적 정부와의 정면충돌은 피하면서 ‘민간자율 범위’를 최대한 확보해나간다는 입장이지만 정부는 해당그룹 총수의 결단이 없이 시간만 끌 경우에는 더욱 강도 높은 개입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 앞으로 정 재계간 큰 시각차가 어떤 접합점을 찾게 될지가 관심사다.

〈이영이기자〉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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