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지원 임박/협상과정 우여곡절]타결후 미합의 번복

  • 입력 1997년 12월 1일 20시 03분


임창열(林昌烈)경제부총리가 1일 새벽 공식 발표한 「국제통화기금(IMF)과 협상 완전타결」이 불과 10시간 뒤 미셸 캉드쉬 IMF총재에 의해 뒤집어져 한국의 국제 신인도가 또 한번 땅바닥에 떨어졌다. 한국의 경제주권이 IMF에 넘어갔음을 뼈아프게 느끼게 해준 해프닝인 셈이다. 임부총리는 1일 0시30분 IMF실무협의단과 협상을 끝낸 뒤 『최종협상안을 만들었다』며 협상타결을 선언했다. 내년도 성장률 3%대, 부실금융기관의 단계적 정리 등으로 타결됐다는 것. 임부총리는 『협상안 내용 발표는 캉드쉬총재의 재가를 받아 이뤄질 것』이라며 『오전중 캉드쉬 총재와의 전화통화를 거친 뒤 곧바로 협의안을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캉드쉬총재가 협상안을 허락하지 않을 경우 협상타결은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상황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전 10시30분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를 방문중인 캉드쉬총재는 임부총리와의 통화에서 최종 협상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재정경제원에 따르면 캉드쉬 총재는 『내년도 성장률을 2.5%로 해야 하며 금융기관 파산정리를 과감하게 시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캉드쉬총재는 최종협상안이 한국의 구조 조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내리고 거부한 셈이다. 한국정부에 대한 국제적 불신이 극에 달해있음을 확인해 준 사례다. 국제금융기관과 선진국들은 「나중에 처리하겠다」는 한국정부의 약속이 대부분 「하지 않겠다」라는 사실임을 경험적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이날 콸라룸푸르에서 아세안+6개국 재무장관회의에 참석중인 티모시 가이드너 미국 재무부차관보는 『한국은 극적인 금융구조조정 없이는 금융시장의 신뢰도를 회복할 수 없다』며 『한국은 신속한 조치를 명확하고 구체적 시기에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기관의 조기정리안을 받아들이라는 주문이다. 또 조셉 스티글리츠 세계은행(IBRD) 부총재도 『2일 중 세계은행 지원팀이 방한(訪韓), 자금지원과 함께 기업퇴출제도 정비를 조언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을 향한 국제적 압력이 총체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날 낮 12시로 예정됐던 기자회견은 전격 취소된 가운데 임부총리는 오후내내 캉드쉬총재에게 매달리는 상황이 연출됐다. 외신에선 「협상안이 타결되지 않았다」는 캉드쉬총재의 발언이 전해졌다. 다급해진 임부총리는 오후 2시경 3당 정책위의장의 협조를 구하고 캉드쉬총재에게끝까지 매달렸지만 재가를 받지 못했다.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정부 대응은 여전히 실패작이었다. 국민이 전혀 모르는 사이 재경원은 지난달 17일경 캉드쉬총재와의 비밀접촉에서 IMF구제금융지원에 합의하고 21일 IMF구제금융신청을 전격 발표했다. 23일 IMF협의단이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2백5억달러였고 가용달러는 1백억달러 내외였다. 2주일을 버티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26일 도착한 나이스단장은 한국의 외환사정을 정확히 알자마자 위기상황임을 직감하고 일사천리로 협상을 진행시켜 나갔다. 27일 나이스단장은 내년도 성장률을 2.5%까지 낮추고 부실 금융기관을 과감하게 파산정리할 것을 요구했다. 당초 4∼5%선을 예상했던 우리정부는 다급한 나머지 일본에 구원의 손길을 펼쳤다. 하지만 야마이치증권 파산 등 금융기관 연쇄도산을 겪던 일본측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28, 29일의 방일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임부총리는 29일 오후부터 IMF와의 협상에 매달렸다. 12월초순에 IMF자금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국가파산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29일과 30일 양측은 철야협상을 벌였다. 임부총리는 1일새벽 나이스단장과의 합의문을 놓고 국민에게 「최종타결됐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캉드쉬총재의 거부로 우리정부는 백기항복(白旗降伏)하는 길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돼 버렸다. 〈임규진기자·콸라룸푸르〓이용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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