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 대출경로]『94년부터 고위층 노골적 청탁』

  • 입력 1997년 1월 27일 20시 34분


[白承勳·許文明·千光巖기자] 한보철강에 대한 채권은행들의 거액대출은 얼굴을 감춘 「배후세력」과 鄭泰守(정태수)한보그룹총회장의 압력성 청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李秀烋(이수휴)은행감독원장에 따르면 정총회장은 한보철강이 부도위기에 몰렸던 작년 10, 11월 두차례에 걸쳐 은행감독원으로 자신을 방문, 노골적으로 대출청탁을 했다. 기업총수가 감독기관의 장을 찾아가 「배후」를 풍기며 은행대출을 청탁한 것은 보통 상식으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93년말까지만 해도 거래가 없거나 미미했던 제일 산업 조흥 외환은행들이 「한보돕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보철강이 아산만철강단지 사업확대로 소요자금이 급격히 늘어난 지난 94년부터 고위층의 「압력성 청탁」이 노골화된데 있다고 은행 관계자들은 증언하고있다. 27일 은행감독원이 내놓은 「은행별 한보철강여신현황」을 보면 전후의 사정이 확연히 드러난다. 제일 조흥 외환은행은 93년까지 한보철강과의 거래가 거의 없었으나 94년부터 여신이 갑자기 불어나 지난 25일 현재 1조7백83억∼4천2백2억원에 달하고 있다. 주요채권은행장들은 하나같이 한보대출 과정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지만 실무선에선 『오랜 거래은행인 서울 상업은행이 한보철강과 멀어지는 시점에서 거래가 없던 은행들이 동시에 한보에 대출에 나선 것은 「모종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산은의 경우 92년부터 두차례 사업타당성 조사를 거쳐 당진공장에 설비자금을 빌려줬으나 94년말부터 한보철강의 사업비가 3조6천억원에서 5조원대로 불어나자 실무선에서는 대출을 꺼렸다고 산은관계자는 말했다. 채권은행 고위관계자는 『그러나 94년말부터 한보철강 투자비가 당초계획을 크게 웃돌면서 정치권 실세중 한 사람이 한보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고 털어놨다. 이때문에 은행들이 「위험」을 알아차리고도 어쩔 수 없이 대출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금융계 다른 고위인사는 『전화로 청탁할 때는 딱부러지게 말하지 않고 「국가기간산업」운운하며 간접화법을 많이 썼다』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뻔히 아는 이상 대출을 안해주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특히 채권은행의 한 임원은 『한보가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던 작년 하반기부터는 은행의 실무자들이 「한보철강에 더 이상 대출해서는 안된다」며 반대하고 나섰지만 이같은 분위기때문에 결국 4개 은행이 1천억원씩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또 채권은행들이 작년말 4천억원과 지난 8일 1천2백억원 등 모두 5천2백억원을 추가 지원한 것도 은행의 자의가 아니며 그로부터 한달도 안돼 「부도」로 선회한 것 역시 은행 자체의 판단이 아니었다. 모 시중은행장은 『은행 속성상 투자사업에 한번 대출해준 이상 끝까지 살려보려고 하지 공장완공 직전에 죽이지 않는다』며 『한보와 같은 기업을 부도처리하는 것은 은행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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