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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윤봉길 의거, 동아일보가 처음 알려”

입력 2017-12-02 03:00업데이트 2017-12-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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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85주기 한일학술회의
“조선인이 폭탄 던졌다” 호외만 4번, 윤봉길 이름-사진도 동아가 첫 게재… 日 언론 통제속 민족지의 사명 수행
日교수 “세계 독립운동사에 큰 의의”
中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직후 두번째 호외 동아일보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 당일 두 번째로 낸 호외. 의거의 주인공이 조선인으로 판명됐고, 이름은 윤봉길, 나이는 25세라는 것을 강조하며 머리기사 제목으로 달았다. 아래 사진은 윤봉길 의사 순국 당시 모습. 동아일보DB·독립기념관 제공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동아일보는 가장 먼저 호외를 내며 소식을 알렸고, ‘조선인 윤봉길’이라는 이름도 당일 호외를 통해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이는 당시 동아일보가 상하이의 통신원과 직접 교류하고 있었다는 걸 뜻하죠.”

독립기념관은 한국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린 윤봉길 의사의 순국 85주기(19일)를 맞이해 2, 3일 일본 가나자와대에서 ‘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을 주제로 한일 공동 학술회의를 연다. ‘윤봉길 의거에 대한 국내외 언론 반응’을 발표하는 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1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상하이와 직통하지 않고서는 이처럼 발 빠르게 보도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동아일보는 1932년 4월 29일 윤 의사 의거 직후 첫 호외를 내고 “조선인이 폭탄을 던졌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두 번째 호외에서는 머리기사 제목으로 “조선인으로 판명, 윤봉길, 연령 25세”라며 이름도 처음으로 밝혔다. 5월 1일까지 호외만 4번을 낸 신문도 동아일보뿐이다.

윤 의사의 사진을 처음으로 게재한 것도 동아일보 5월 3일자다. 윤 의사의 가족사진도 함께 실었다. 5월 4일자에는 윤 의사 체포 장면 사진을 실었고, 7일자에는 윤 의사와 가족의 근황을 자세히 보도했다. 8일자에는 일본 육군성이 사건의 전모를 밝히자 이를 토대로 임시정부를 비롯해 상하이의 독립운동 근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이후 윤 의사 순국 때까지 의거로 체포당한 안창호 선생의 국내 압송, 윤 의사 군법회의, 일본 호송 등 속보를 이어갔다. 그해 11월 22일자 윤 의사의 사형이 오사카에서 집행될 예정이라는 기사에도 윤 의사의 사진을 실었다. 홍 연구위원은 “당시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뒤로 언론 통제도 극심했던 상황”이라며 “동아일보가 ‘목숨을 걸었다’ 싶을 정도로 통제를 비집고 계속 윤 의사 관련 기사와 사진을 올리면서 민족지로서 사명을 다했다”고 말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도 윤 의사의 의거 당일 바로 호외를 내는 등 보도를 했다. 그러나 ‘조선인 윤봉길’에 대한 보도를 애써 지우려 하면서 폭탄 폭발 상황과 일본인 부상자의 피해, 그리고 사건에 대한 국제사회의 동정에 무게를 뒀다는 게 홍 연구위원의 분석이다.

당시 미국을 제외하고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 해외 언론은 대체로 윤봉길 의거를 ‘테러 사건’으로 규정하고, 부상당한 일본인에 대한 동정과 중일 간에 추진하던 정전협상에 주목했다.

한편 다무라 미쓰아키 전 일본 호쿠리쿠대 교수는 학술회의 발표문 ‘세계사적 저항운동의 관점에서 본 윤봉길 의거’에서 “윤봉길의 의거는 프랑스의 반(反)나치 레지스탕스 활동과 같다”고 평가했다. 다무라 교수는 “레지스탕스는 점령군에게 타격을 주는 모든 활동”이라며 “조선의 의병투쟁이나 윤봉길의 의거는 히틀러 암살 시도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열강에 저항한 세계 독립운동사에 큰 의의를 지닌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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