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애국 의지 담긴 ‘이순신 장검’ 국보됐다

  • 뉴시스
  • 입력 2023년 8월 24일 10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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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이 충무공 이순신의 숭고한 행적이 서린 보물 ‘이순신 장검’을 국보로 지정하고, 보물 ‘이순신 유물 일괄’에 기존 옥로, 복숭아 모양 잔과 받침, 요대 외에 요대를 보관했던 ‘요대함’을 추가 지정했다고 24일 밝혔다.

이순신 장검은 보물 ‘이순신 유물 일괄’에 포함됐던 칼이다. 길이가 약 2m에 달한다. 크기와 형태가 거의 같은 한 쌍이 각각 칼집을 갖췄다.

한 장검의 칼날 위쪽에는 이순신이 직접 지은 시구 ‘삼척서천산하동색(三尺誓天山河動色,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이, 다른 장검에는 ‘일휘소탕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山河,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가 새겨져 있다. 이는 ‘이충무공전서’(1795)의 기록과 일치한다.

나무로 만든 칼집에 가죽끈을 매달아 몸에 찰 수 있게 했다. 칼자루 속 슴베에 새겨진 ‘갑오사월일조태귀련이무생작(甲午四月日造太貴連李茂生作, 갑오년 4월에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이라는 글귀로 제작 시기와 제작자를 알 수 있다.

이 장검은 조선시대 군용 도검 형식이다. 나무틀에 어피를 감고 주칠을 한 칼자루,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돌기를 만들어 칼자루 표면에 부착한 금속판, 은입사기법으로 장식한 전통무늬, 칼날에 새긴 명문과 물결무늬, 칼집 패용 장식과 가죽끈, 칼집 상단 테두리와 하단 마개 등이 모두 조선 도검에서 보이는 전통 양식이다.

도검 제조기술이 발달한 일본 도검의 요소도 일부 적용됐다. 슴베와 칼자루를 결합했을 때 구멍을 맞추고 못을 끼워 고정하기 위한 목정혈, 칼자루를 단단히 쥘 수 있게 가죽끈을 X자로 교차해 감은 방식, 칼날이 휘어진 곡률, 혈조를 넣는 방식 등이 이에 해당된다.

문화재청은 이순신 장검의 칼날에 새겨진 시구가 ‘이충무공전서’ 기록과 일치하는 등 충무공 이순신의 역사성을 상징하는 유물로 가치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칼자루 속 슴베에 1594년 태귀련, 이무생이 제작했다는 명문이 있어 제작연대와 제작자가 분명하고 조선 도검에 일본 제작기법이 유입돼 적용된 양상을 밝힐 수 있어 학술적 가치도 높다고 평가했다.

또 칼날의 예리함과 견고함, 칼날에 새긴 명문 및 물결무늬 선각장식 기술성, 칼자루 및 칼집의 테와 고리를 장식한 은입사기법, 가죽?금속?칠 등 다양한 전통공예의 조화로운 활용, 세련된 균형미와 조형감각 등 뛰어난 제작기술과 수준 높은 예술성을 두루 갖췄고 제작연대가 오래됐음에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이 장검은 당초 외날이라는 형태적 특성상 ‘이순신 장도’라는 이름으로 지정 예고됐다.

문화재청은 “‘전통적으로 유형에 따른 ‘도’와 ‘검’의 구분은 있었으나 고대에 명칭이 혼용돼 사용됐다는 점, 검이라는 단어는 권위와 의례와 관련돼 칼의 격을 높일 때 사용한다는 점, 특정 소장자를 강조하거나 용도가 확실한 경우 외날이어도 검이란 명칭을 사용한다는 점, 오랜 기간 장검으로 인식돼 불렸다는 점을 인정해 ‘이순신 장검’이라는 명칭으로 국보로 지정했다”고 설명했다.

보물 ’이순신 유물 일괄‘에 추가 지정된 요대함은 요대를 담아 보관했던 둥근 나무함이다. 아름드리나무를 베어 일정 간격으로 칼집을 넣어 세우고 판재에 베 싸기를 한 후 겉은 흑칠, 안은 주칠을 했다.

문화재청은 “조선의 전통 공예기법과 높은 기술 수준으로 제작됐고 비슷한 다른 유물들에 비해 크기가 매우 크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며 “당시 관복 및 요대의 보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는 점에서 학술적?자료적 가치도 높다”고 평가했다.

이어 “요대함이 이미 지정된 요대와 함께 보존될 때, 해당 유물 가치가 동반 상승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 보존?관리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난초 그림 ’김정희 필 불이선란도‘를 비롯해 ’기장 고불사 영산회상도‘, ’파주 보광사 동종‘, ’불조삼경‘도 보물로 지정했다.

김정희 필 불이선란도는 10대 때부터 묵란을 그렸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난초를 서예 필법으로 그려야 한다는 자신의 이론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달준(達?)이라는 인물에게 그려준 이 작품은 화면 가운데 난초를 옅은 담묵으로 그렸다.

회화사상 보기 드물게 그림 제작 배경, 감상평 등을 기록한 제발(題跋)을 4군데에 썼다. 글씨는 여러 서체를 섞어 썼으며, 글자 모양과 크기에 차이가 있다.

문화재청은 “19세기 문화사를 상징하는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 세계를 종합적으로 대변하는 작품으로 높은 예술적?학술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며 “인장을 통해 전승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기장 고불사 영산회상도는 화기에 있는 기록을 통해 1736년 제작된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불화다.

제작한 화승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특색 있는 머리 모양, 여래를 중심으로 짜임새 있고 안정적으로 구성된 구도와 배치, 채도가 낮은 적색과 녹색의 강한 대비 등으로 볼 때 경북지역, 특히 팔공산 일원에서 활약한 의균 화파 화승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영축산에서 석가모니불이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비단 바탕에 색을 칠해 표현했다. 꽃잎형 광배를 갖추고 불단 형식 대좌에 결가부좌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지장보살 등 8위의 보살과 사천왕, 십대제자 등 권속들을 위계와 역할에 맞춰 좌우로 배치했다.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한 영산회상도이면서 권속으로 아미타팔대보살에 속하는 지장보살을 표현했다. 이 형식은 19세기 경상도 일대, 서울, 경기도에서 제작되는 후불도의 한 유형이다.

문화재청은 “제작시기가 18세기 전반인 것으로 보아, 이러한 형식을 가진 후불도의 최초 제작시점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의를 지닌다”며 “석가 신앙과 아미타 신앙의 융합을 보여주는 자료로써 조선 후기 불화 형식과 신앙 변화 연구에 중요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도설된 내용과 화기에 기록된 화제가 일치해 18세기 전반 영산회상도 도상 연구 기준이 된다“고 덧붙였다.

파주 보광사 동종은 제작 배경, 제작자, 재료 등의 내용을 담은 기록인 주성기를 통해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활약한 승려 천보가 청동 300근을 들여 1634년 제작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동종이다.

중국종 형식에 우리 고유의 미감을 반영한 조선 전기 동종의 새로운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세 줄로 만든 횡대로 종 몸체가 상단과 하단으로 나뉜다. 상단에 분할주조방식을 엿볼 수 있는 형틀 분리의 모습이 보인다.

하단에는 해서체로 적은 주성기가 보인다. 이를 통해 동종 제작연대와 목적, 봉안 지역과 사찰, 발원자와 후원자, 장인과 재료 등 중요하고 다양한 내력이 분명하게 확인돼 사료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문화재청은 ”천보의 마지막 작품으로 조선 전기에서 후기로의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예사적으로 의미가 있다”며 “조선 후기 동종 제작기법 연구에 있어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했다. 원 봉안처를 떠나 옮겨지는 일이 많은 다른 동종과 달리 최초 봉안처에서 온전히 그 기능을 수행하며 잘 보전돼 온 점에서 역사성도 인정했다.

석왕사 소장 불조삼경은 원나라 판본을 바탕으로 1361년 전주의 원암사에서 번각한 목판본이다.

중국 원나라 고승인 몽산(蒙山) 덕이(1231~1308)가 석가와 조사가 설법한 3가지 경전을 결집한 불서다. 불교의 교훈적 가르침을 쉽게 설명해 불교 경전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크게 도움을 주는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불조삼경의 고려시대 판본은 현재 3종만 알려져 있다.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1341년 정각사 판본, 1361년 전주 원암사에서 간행된 판본 및 1384년에 간행된 판본이 남아 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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