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처녀귀신은 다 어디에서 왔을까[정보라의 이 책 환상적이야]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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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귀신하면 떠오르는 건
긴 머리와 소복 차림의 여성 귀신
생존투쟁이 ‘恨 품은 여인’ 만들어
◇여성, 귀신이 되다/전혜진 지음/344쪽·1만6500원·현암사

정보라 소설가
정보라 소설가
여름에는 역시 으스스한 귀신 얘기가 제격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귀신’은 신이한 존재와 죽은 사람의 넋을 모두 합쳐 이르는 단어다. 도깨비나 요괴부터 장가 못 가서 원한이 맺힌 몽달귀신, 밥을 굶어 죽은 아귀, 객지에서 비명횡사한 객귀, 정체를 알 수 없는 잡귀 등 종류도 아주 많다. 한국은 풍부한 민속신앙과 구비전승을 갖춘 나라이며 ‘귀신’이라는 단어 속에 무속신앙, 불교, 도교, 유교의 개념이 모두 섞여 있기 때문에 귀신 이야기도 많고 귀신의 개념 자체도 입체적이고 복잡하다.

그러나 평범한 한국 사람에게 귀신에 대해 물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은 아마도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일 것이다. 처녀귀신은 보통 원한을 품고 죽어서 귀신이 되고, 그래서 용감한 원님이나 지혜로운 선비가 그 원한을 풀어주면 생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 감사를 표하고 저승으로 떠난다. 끝. 이렇게 기본적인 구조는 거의 비슷한데 처녀귀신 이야기에서 핵심이 되는 원한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계모의 학대 때문에 죽어 원한을 품기도 하고, 성범죄의 피해자가 돼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어 원한을 품기도 한다. 한국은 어쩌다가 처녀귀신의 나라가 됐을까? 한국의 전설은 어째서 다 원한 가득한 이야기들밖에 없을까?

책은 바로 이런 의문을 상세한 예시와 함께 풀어주는 역사서 겸 설화집 겸 해설서다. 단순히 여러 가지 귀신 얘기를 모아놓은 것만이 아니다. 야담의 개념부터 시작해서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시대가 지나가고 조선시대 유교가 도입되면서 변화된 생활상까지, ‘여성, 귀신이 되다’는 귀신 이야기의 배경에 자리 잡은 맥락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작가는 여성이 남성에게 제도적, 관습적으로 종속되면서 겪어야 했던 ‘한과 설움’이 아니라 약자들 사이의 생존투쟁에 주목한다. 남편의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만 존재를 유지할 수 있던 본처와 첩의 갈등, 아들을 내줄 수 없는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매달려야만 하는 며느리의 충돌, 자식을 통해서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기에 전처 자식을 구박하고 자기 자식만을 남편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계모까지, 집안의 성인 남성 한 명에게 어머니도 아내도 딸도 매달려야 했던 현실이 귀신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조선의 사회 체제 안에서 여성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수도 없고 억눌린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결국 원한을 품고 죽은 여성 귀신의 이야기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고, 귀신이 된 뒤에야 비로소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었던 억압적인 시대에 대해 작가는 풍부한 예시를 통해 차근차근 보여준다.

그냥 귀신 얘기만 골라서 읽어도 된다. 익숙한 처녀귀신부터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사랑 이야기까지 한국 전통의 공포 이야기, 가장 한국적으로 무서운 상상력을 되짚는다는 관점에서 읽어도 무척 재미있는 책이다.


정보라 소설가
#여성 귀신#한 품은 여인#생존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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