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총 ‘과학발굴’ 기반 닦아… 내부 첫 공개 ‘현장 전시관’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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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 발굴 50주년… 신라고분 발굴 의의와 보존-활용

1973년 천마총 부장품 수장궤에서 발견된 천마도(위 사진).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졌으며 신령한 말이 구름 사이를 헤엄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천마총 발굴은 사진과 실측도, 발굴 일지 등이 체계적으로 기록된 한국 최초의 과학적 발굴로 꼽힌다. 아래 왼쪽 
사진은 천마총 발굴 당시 봉토를 걷어내고 매장주체부를 조사하는 모습. 아래 오른쪽 사진은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천마총 내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동아일보DB
1973년 천마총 부장품 수장궤에서 발견된 천마도(위 사진).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졌으며 신령한 말이 구름 사이를 헤엄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천마총 발굴은 사진과 실측도, 발굴 일지 등이 체계적으로 기록된 한국 최초의 과학적 발굴로 꼽힌다. 아래 왼쪽 사진은 천마총 발굴 당시 봉토를 걷어내고 매장주체부를 조사하는 모습. 아래 오른쪽 사진은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천마총 내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동아일보DB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경북 경주시 천마총 발굴은 ‘한국 과학 발굴의 시초’로 평가되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75)와 건축 문화재 전문가인 한동수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63)의 기고를 통해 천마총 발굴과 신라 고고학의 발전, 신라 고분의 보존과 활용에 대해 짚어 본다.》







[기고]신라 연대구분 정밀해져, 한국고고학 연구에 기여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1973년 4월에 시작된 천마총 발굴은 1975년까지 이어진 황남대총 발굴의 예비적 성격으로 이뤄졌다. 당시 유적 발굴 환경은 참으로 열악했다. 발굴 경험이 있는 연구자도 몇 안 됐고, 변변한 장비도 없었다. 하지만 천마총 발굴에서 시작된 신라 고고학의 변화는 컸다.

천마총의 발굴은 봉분 꼭대기부터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둑을 두고 파내려가는 4분법으로 시행됐고, 전 과정이 정밀한 실측도로 작성됐다. 유구를 부분적으로 드러내며 유물만 찾던 수준을 넘어 유적의 발굴조사 기법이 본격적으로 적용됐고 사진과 실측도, 현장 야장(野帳)과 발굴일지의 기록이 이뤄졌다. 사실상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과학적 발굴의 시작이었다.

신라 고고학 자료의 편년(編年·자료에 연대를 부여함)은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발굴 전후로 극명하게 나뉜다. 두 곳의 발굴 성과가 반영되면서 편년이 정밀해져 이제 경주 시내의 적석목곽분이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초엽까지 축조된 신라 마립간 시기 최고 지배세력의 고분들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천마총은 514년 숨진 지증왕릉으로 견해가 모이고 있다.

천마총이나 황남대총 같은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지상에 거대한 봉분을 가진 고총(高塚)이다. 고총은 국가가 성립하거나 사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단계에 등장하는 무덤 형식이다. 두 무덤의 발굴, 그리고 그에 따른 신라 고고학 자료의 편년으로 신라에서 고총이 출현하고 축조된 시기가 분명해졌다.

두 무덤에서는 무덤 주인의 권위나 정치적 위세를 드러내는 위세품(威勢品)인 금관과 금제허리띠, 금제귀걸이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고총과 위세품 체계 연구로 신라의 정치적·사회적 발전과 지방 지배 양상을 밝힐 수 있게 됐다.

신라 적석목곽분이 마립간 시기의 고분으로 밝혀짐에 따라 신라에서 그 이전 이사금 시기에는 덧널무덤(목곽묘)이, 6세기 중엽 법흥왕 때부터는 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축조됐고, 각 시기에 따라 토기 양식도 바뀌어 간 것으로 드러났다. 신라의 고고학적 문화가 이와 같이 변화·발전한 것이 밝혀짐으로써 문헌 사료 중심의 신라사 연구와 신라 고고학 연구의 접목이 가능해졌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사료 비판도 발전된 신라 고고학에 근거를 두고 이뤄지게 됐다.

우리나라 유물 보존과학의 눈부신 발전도 기초 과학자가 처음으로 참여한 천마총의 발굴현장에서부터 시작됐다. 천마총 발굴에서 시작된 신라 고고학의 발전은 한국 고고학과 고대사 연구에 두루 영향을 미쳤다.

[기고]관광객 필수 방문 코스… 진품 전시 방안 고려를






한동수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한동수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1973년은 경주에 산재한 신라 문화 유산의 보존과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뜻깊은 해였다. 광복 이후 첫 대규모 고건축 복원 사업이던 불국사 공사가 4년 만에 준공됐으며, 역시 광복 이후 첫 대규모 고분 발굴이던 천마총 발굴이 이루어져 금관과 천마도 등 대량의 유물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이후 불국사는 국내 유일의 전각과 회랑을 모두 갖춘 사찰로 다시 태어났으며, 천마총은 고분 내부를 모두 공개하고 출토 유물을 현장에 전시하는 최초의 전시관으로 변신하였다.

이 시기 경주에는 보문단지를 중심으로 한 관광시설의 건설과 경주박물관 등 문화시설의 신축, 신라 문화 유산에 대한 보수 등 다양한 문화 사업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지원 정책도 속속 수립되었다.

천마총은 출토 유물로 그 이름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지만, 실질적으로 일반인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한 것은 신라 고분의 내부를 직접 볼 수 있도록 유물 전시관의 형태로 보존해 개방했다는 점이었다. 중국 베이징 교외 창핑에 있는 명 13릉 중 정릉이 황제의 능 가운데 유일하게 발굴을 통해 개방하며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였듯이 천마총도 경주를 방문하는 국내외 관광객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되었다. 또 한국을 찾는 국빈들에게 찬란한 한국 문화 유산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1976년 만든 사적기에는 “이 천마총을 발굴 조사가 끝난 뒤 원형대로 복원을 했으며 그 내부만을 후세의 교육을 위하여 공개하기로 하였다”라는 문구를 남겨 내부 공개 목적을 엿볼 수 있다.

천마총 내부를 전시관의 형식으로 보존해 공개한 것은 당시 매우 파격적인 것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공사 부실로 천장의 누수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8년에는 디지털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전시 방식을 포함해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토 유물의 유지 관리를 위한 어려움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천마총 내부 공개가 더욱 진정성을 갖는 한편 장소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출토 유물의 복제품이 아니라 진품을 전시하는 방안을 고려해 보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아울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옛사람이 잠들어 있던 무덤 내부를 방문하는 만큼 무엇보다도 경건하고 정숙한 마음가짐으로 전시관에 전시된 유구와 유물을 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대한민국학술원 회원
한동수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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