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줄무늬, 중세시대엔 악마의 표식이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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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프, 혐오와 매혹 사이/미셸 파스투로 지음·고봉만 옮김/238쪽·2만2000원·미술문화

중세 유럽의 여러 사료나 도상에 나오는 악마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머리에 뿔이 달렸고, 몸에 반점이나 줄이 가로로 그어져 있다. 이 때문인지 12, 13세기에 줄무늬 옷은 비하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당시에 줄무늬 옷을 입는 이들은 집시나 죄수처럼 사회에서 배척받는 사람들이었다.

줄무늬 옷이 기본 아이템으로 여겨지는 현대사회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엔 줄무늬 자체가 혼란을 야기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스위스 로잔대와 제네바대에서 초빙교수를 지내며 ‘중세 문장학의 대가’로 꼽히는 저자는 “중세인은 자연에서 줄무늬를 발견하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기에 공포감과 혐오감을 느꼈다”고 설명한다.

무질서의 상징이던 줄무늬는 근대 유럽에서 새로운 지위를 얻는다. 가로 줄무늬가 아니라 세로 줄무늬가 등장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장 클루에(1486∼1540)의 그림 ‘프랑수아 1세의 초상’에서 보듯, 군주들마저 세로 줄무늬 옷을 입고 초상화 모델로 설 정도였다. 세로 줄무늬가 귀족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상징물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계층의 상징이나 이국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줄무늬는 미국으로 건너가 또 한번 변화를 맞는다. 직물이나 실내 장식으로 퍼지던 줄무늬는 독립혁명이 시작된 1775년을 기점으로 정치적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당시 미국인은 영국에 맞서며 13개의 식민지를 뜻하는 빨간색과 하얀색으로 이뤄진 가로 줄무늬 깃발을 만든 것이다. 이때부터 줄무늬는 자유주의 독립사상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등극했다.

전위적인 예술가들에겐 줄무늬가 도발적이면서도 불량스러운 이미지로 애용됐다. 괴짜였던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위아래로 줄무늬 옷을 입은 모습을 자주 드러냈다. 프랑스 설치미술가 다니엘 뷔렌(84)도 줄무늬를 주제로 50년 가까이 활동하고 있다. 줄무늬라는 하나의 소재를 따라 천변만화하는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줄을 긋는다는 하나의 행위가 어쩌면 가장 파격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스트라이프#혐오#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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