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진정한 치료의 시작은 아픔의 내력을 들여다보는 일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8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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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아서 클라인먼 지음·이애리 옮김/476쪽·2만4000원·사이

저자와 부인의 모습. 저자는 50대 후반에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아내를 10년 넘게 간병한 뒤부터 질병이 한 사람의 생애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책에는 ‘만성질환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그 가족으로서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사이 제공
저자와 부인의 모습. 저자는 50대 후반에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아내를 10년 넘게 간병한 뒤부터 질병이 한 사람의 생애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책에는 ‘만성질환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그 가족으로서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사이 제공
만성통증은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미국인 하워드 해리스는 6·25전쟁에 참전해 훈장까지 받은 참전용사. 용맹했던 그를 바꾼 건 찰나의 사고였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허리가 툭 하고 끊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의사는 단순 근육경련이라 진단했지만, 이후 순간순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해리스를 진짜 힘들게 한 건 통증 자체보다 이를 용인해 주지 않는 세상이었다. 수시로 병가를 내는 직원을 참아줄 직장은 없었다. 가족마저 가계에 보탬이 안 되는 그를 가장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어디 가서 아픔을 토로할 수조차 없었다.

“이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제 통증을 볼 수 없으니까요. 가끔은 사람들이 제 말을 안 믿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이게 저를 정말 미치게 합니다.”

미 하버드대 의과대학 교수로 30년간 2000명이 넘는 환자를 만나온 저자는 해리스처럼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환자들에게 천착했다. 현지에서 1988년 처음 출간됐는데, 만성질환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가 환자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 명저로 꼽힌다.

국내에서 처음 소개되는 이 책은 2020년 개정판 버전. 만성통증증후군이나 만성피로, 우울증 등 오래된 질환을 앓는 환자 20여 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의 속내를 읽다 보면, 통증도 심각한 문제지만 그에 무감한 세상의 시선이 환자들을 더 고립시킨다는 걸 깨닫는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앓는 중국인 여성 옌. 그의 병을 이해하려면 그가 살아온 생애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엘리트 계급에 속했던 옌의 가정은 문화혁명을 거치며 ‘냄새나는 지식인’이라 지탄받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집 밖을 나서면 누군가 손가락질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만성두통과 피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교육 과정도 제대로 마칠 수 없었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며 자포자기했다. 옌의 사례는 사회적 낙인과 차별이 한 사람의 몸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질병에는 한 사람의 생애가 녹아 있기에 진통제 한 알로 치유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마주한 첫 번째 환자가 그랬다. 의대에 재학할 당시 응급실로 실려 온 전신화상을 입은 일곱 살 아이였다. 그 어린애가 화상 부위의 살갗을 벗겨내는 끔찍한 치료를 매일매일 견뎌야 했다. 풋내기 의대생이던 저자는 온몸으로 토해내는 비명을 들으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아이의 손을 붙잡고 끊임없이 말을 거는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 저자는 아이에게 “어떻게 이 고통을 견디는지, 치료를 겪는 느낌이 어떤지”를 물어봤다. 그 순간, 변화가 찾아왔다. 고작 일곱 살배기 아이가 자기만의 어휘를 이용해 정확하게 통증을 설명했다. 이후부터 치료실에 들어서는 아이는 전보다 훨씬 씩씩하게 고통을 견뎌냈다. “환자는 누구나 자신의 질병에 대해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걸 해내는 순간 자기 자신에게 그 고통을 감내할 힘도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확신한다.

물론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이 옳다고 하긴 어렵다. 플라세보 효과도 있다지만, 어쨌든 치료는 과학의 영역이니까. 하지만 그 최전선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저자 말마따나, 어쩌면 환자와 그 가족이 겪는 고통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공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치료법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이 책은 미국과 일본 등에서 여전히 ‘의료인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출간된 지 34년이 지났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 메시지가 많기 때문이다. 치료는 상처가 아니라 생명을 다루는 일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치료의 시작#아픔의 내력#만성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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