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보며 좌절…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 못 만들겠구나”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13일 11시 09분


코멘트
1990년대 영화계의 아이콘인 왕가위(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영화는 시간을 초월한다. 개봉된 지 20~30년이 지났지만 그의 영화는 아직도 극장에 내걸리고, 20대 청춘남녀가 그 극장을 가득 채운다. 불같이 사랑했던 순간, 그 순간이 지나간 뒤의 상실감과 쓸쓸함을 포착해내는 작품의 힘 덕일 것이다. 떠난 사랑을 잊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 순간으로 회귀하는 ‘아비정전’ ‘중경삼림’ ‘해피투게더’ ‘화양연화’ 속 인물을 통해 관객은 찬란했던 사랑의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해피투게더’ 촬영 당시 왕가위 감독. ‘왕가위의 시간’을 출간한 모인그룹 정태진 대표가 소장하고 있던 미공개 스틸사진이다. 모인그룹 제공
‘해피투게더’ 촬영 당시 왕가위 감독. ‘왕가위의 시간’을 출간한 모인그룹 정태진 대표가 소장하고 있던 미공개 스틸사진이다. 모인그룹 제공


“‘화양연화’보며 좌절감 느꼈다” 윤제균이 본 왕가위

열렬히 사랑했던 시간에 천착해온 감독 왕가위.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집 ‘왕가위의 시간’(모인그룹·열아홉)이 17일 출간된다. ‘해리포터’ 시리즈 출판사인 영국 블룸스버리에서 출간된 ‘Auteur of Time’(2005년)의 번역서로, 국내에 소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책 출간 후 나온 왕가위 감독의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2008년), ‘일대종사’(2013년) 등의 분석을 추가한 비평집이 지난해 중국 북경대 출판부에서 출간됐다. 한국어 번역본은 영국과 중국에서 출간된 두 책 내용을 합쳤다. 책의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국제시장’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 번역의 감수를 맡은 김중섭 경희대 국문과 교수를 6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에서 만났다.

윤 감독은 왕가위 감독과의 영화 공동제작 논의 차 2016년 홍콩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즈음 한한령(限韓令·한류 금지령)이 터지면서 계획은 무산됐다. 당시 왕가위 감독 영화의 국내 배급사인 모인그룹의 정태진 대표가 동석했고, 정 대표는 책 출간을 결정하자마자 윤 감독에게 기획위원으로 참여해 줄 것을 제안했다. 경희대 영화동아리 ‘그림자놀이’를 지도하고 있는 김 교수도 정 대표와의 인연으로 감수 총괄을 맡았다.

“‘화양연화’를 봤을 때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이 사랑하는 남녀의 애절함을 표현해낸 것에 충격을 받았다. 만약 내가 화양연화를 연출한다면 죽었다 깨나도 왕가위 감독처럼은 못 만들겠다 싶었다. 내게 좌절감을 안긴 감독이자 우상이다. 그의 작품세계를 한국에 제대로 소개할 기회라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다.” (윤 감독)

미공개 스틸사진으로 차별화 한 ‘왕가위의 시간’


‘중경삼림’ 촬영 당시 왕가위 감독의 모습이 담긴 미공개 스틸사진. 모인그룹 제공
‘중경삼림’ 촬영 당시 왕가위 감독의 모습이 담긴 미공개 스틸사진. 모인그룹 제공
‘타락천사’ 촬영 당시 왕가위 감독의 모습이 담긴 미공개 스틸사진. 모인그룹 제공
‘타락천사’ 촬영 당시 왕가위 감독의 모습이 담긴 미공개 스틸사진. 모인그룹 제공
‘왕가위의 시간’이 영어, 중국어 버전의 비평집과 차별화되는 점은 방대한 양의 미공개 영화 스틸사진들이다. 모인그룹이 소장한 왕가위 감독의 제작 현장 모습을 담았다. 왕가위 감독이 사진 선정에 유독 깐깐해 윤 감독과 출판사 측이 제안한 8개 버전의 표지 모두 거절당했다. 최종 결정된 앞표지는 왕가위 감독이 직접 보낸 본인의 옆얼굴, 뒤표지는 화양연화 속 계단을 오르는 수리첸(장만옥)의 뒷모습이다. 윤 감독은 “왕가위 감독이 ‘빠꾸’를 정말 많이 놨다. 우리가 제안한 사진들 중 오케이를 받은 게 거의 없다”면서도 “그의 안목은 남다르더라. 표지에 들어가는 사진 두 장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고스란히 묻어난다”고 말했다.

책의 앞표지. 왕가위 감독이 직접 골라 출판사에 보낸 사진이다.
책의 앞표지. 왕가위 감독이 직접 골라 출판사에 보낸 사진이다.
감수에서는 중국과 홍콩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한 섬세한 번역에 초점을 뒀다. 상하이 출신 홍콩인인 왕가위 감독은 다수 영화에서 중국과 홍콩 간 관계를 메타포로 표현했다. ‘중경삼림’(1994년)은 홍콩의 중국 반환(1997년)을 앞둔 홍콩인들의 불안한 심리를 담았고, 반환 나온 영화 제목 ‘2046’(2004년)은 중국이 용인한 홍콩 자치의 마지막 해를 의미한다. 김 교수는 “올해가 홍콩의 중국 반환 25주년 되는 해라 단어 선택 하나에도 신경 썼다. 왕가위의 정치색을 드러내는 단정적인 문장은 의미는 살리되 순화한 표현을 찾으려 애썼다”고 말했다.

‘왕가위의 시간’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윤제균 감독(왼쪽)과, 감수 총괄을 맡은 김중섭 경희대 교수.
‘왕가위의 시간’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윤제균 감독(왼쪽)과, 감수 총괄을 맡은 김중섭 경희대 교수.
윤 감독을 비롯한 기획 및 감수위원들이 말하는 책의 매력은 영화에 숨겨진 왕가위 감독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점. 특히 아르헨티나 작가 마누엘 푸익과 훌리오 코르타사르,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 등 그가 애독했던 작가들의 문학성이 왕가위 감독 영화의 특징인 인물의 내레이션과 독백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따라가는 분석은 흥미롭다.

“‘영웅본색’이 세계를 휩쓸었을 때 왕가위 감독의 ‘열혈남아’가 나왔다. 당연히 영웅본색과 같은 액션 느와르일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을 부쉈다. 대중성, 상업성이 짙었던 홍콩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한 단계 끌어 올린 이가 왕가위다. 아직도 사랑받는 그의 영화 속 스토리텔링과 미장센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윤 감독)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