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영화계의 아이콘인 왕가위(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영화는 시간을 초월한다. 개봉된 지 20~30년이 지났지만 그의 영화는 아직도 극장에 내걸리고, 20대 청춘남녀가 그 극장을 가득 채운다. 불같이 사랑했던 순간, 그 순간이 지나간 뒤의 상실감과 쓸쓸함을 포착해내는 작품의 힘 덕일 것이다. 떠난 사랑을 잊지 못하고 끊임없이 그 순간으로 회귀하는 ‘아비정전’ ‘중경삼림’ ‘해피투게더’ ‘화양연화’ 속 인물을 통해 관객은 찬란했던 사랑의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화양연화’보며 좌절감 느꼈다” 윤제균이 본 왕가위
열렬히 사랑했던 시간에 천착해온 감독 왕가위.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집 ‘왕가위의 시간’(모인그룹·열아홉)이 17일 출간된다. ‘해리포터’ 시리즈 출판사인 영국 블룸스버리에서 출간된 ‘Auteur of Time’(2005년)의 번역서로, 국내에 소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책 출간 후 나온 왕가위 감독의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2008년), ‘일대종사’(2013년) 등의 분석을 추가한 비평집이 지난해 중국 북경대 출판부에서 출간됐다. 한국어 번역본은 영국과 중국에서 출간된 두 책 내용을 합쳤다. 책의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국제시장’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 번역의 감수를 맡은 김중섭 경희대 국문과 교수를 6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에서 만났다.
윤 감독은 왕가위 감독과의 영화 공동제작 논의 차 2016년 홍콩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즈음 한한령(限韓令·한류 금지령)이 터지면서 계획은 무산됐다. 당시 왕가위 감독 영화의 국내 배급사인 모인그룹의 정태진 대표가 동석했고, 정 대표는 책 출간을 결정하자마자 윤 감독에게 기획위원으로 참여해 줄 것을 제안했다. 경희대 영화동아리 ‘그림자놀이’를 지도하고 있는 김 교수도 정 대표와의 인연으로 감수 총괄을 맡았다.
“‘화양연화’를 봤을 때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이 사랑하는 남녀의 애절함을 표현해낸 것에 충격을 받았다. 만약 내가 화양연화를 연출한다면 죽었다 깨나도 왕가위 감독처럼은 못 만들겠다 싶었다. 내게 좌절감을 안긴 감독이자 우상이다. 그의 작품세계를 한국에 제대로 소개할 기회라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다.” (윤 감독)
미공개 스틸사진으로 차별화 한 ‘왕가위의 시간’
‘왕가위의 시간’이 영어, 중국어 버전의 비평집과 차별화되는 점은 방대한 양의 미공개 영화 스틸사진들이다. 모인그룹이 소장한 왕가위 감독의 제작 현장 모습을 담았다. 왕가위 감독이 사진 선정에 유독 깐깐해 윤 감독과 출판사 측이 제안한 8개 버전의 표지 모두 거절당했다. 최종 결정된 앞표지는 왕가위 감독이 직접 보낸 본인의 옆얼굴, 뒤표지는 화양연화 속 계단을 오르는 수리첸(장만옥)의 뒷모습이다. 윤 감독은 “왕가위 감독이 ‘빠꾸’를 정말 많이 놨다. 우리가 제안한 사진들 중 오케이를 받은 게 거의 없다”면서도 “그의 안목은 남다르더라. 표지에 들어가는 사진 두 장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고스란히 묻어난다”고 말했다.
감수에서는 중국과 홍콩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한 섬세한 번역에 초점을 뒀다. 상하이 출신 홍콩인인 왕가위 감독은 다수 영화에서 중국과 홍콩 간 관계를 메타포로 표현했다. ‘중경삼림’(1994년)은 홍콩의 중국 반환(1997년)을 앞둔 홍콩인들의 불안한 심리를 담았고, 반환 나온 영화 제목 ‘2046’(2004년)은 중국이 용인한 홍콩 자치의 마지막 해를 의미한다. 김 교수는 “올해가 홍콩의 중국 반환 25주년 되는 해라 단어 선택 하나에도 신경 썼다. 왕가위의 정치색을 드러내는 단정적인 문장은 의미는 살리되 순화한 표현을 찾으려 애썼다”고 말했다.
윤 감독을 비롯한 기획 및 감수위원들이 말하는 책의 매력은 영화에 숨겨진 왕가위 감독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점. 특히 아르헨티나 작가 마누엘 푸익과 훌리오 코르타사르,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 등 그가 애독했던 작가들의 문학성이 왕가위 감독 영화의 특징인 인물의 내레이션과 독백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따라가는 분석은 흥미롭다.
“‘영웅본색’이 세계를 휩쓸었을 때 왕가위 감독의 ‘열혈남아’가 나왔다. 당연히 영웅본색과 같은 액션 느와르일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을 부쉈다. 대중성, 상업성이 짙었던 홍콩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한 단계 끌어 올린 이가 왕가위다. 아직도 사랑받는 그의 영화 속 스토리텔링과 미장센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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