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18세기 책상에는 ‘젠더’가 숨어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4일 03시 00분


코멘트

◇18세기의 방/민은경 정병설 이혜수 외 지음/440쪽·2만5000원·문학동네

인도 작가의 그림 ‘살림을 감독하는 임피 부인’(1780년). 임피 부인의 남편은 캘커타 대법원 최초의 대법관으로 파견됐다. 문학동네 제공
인도 작가의 그림 ‘살림을 감독하는 임피 부인’(1780년). 임피 부인의 남편은 캘커타 대법원 최초의 대법관으로 파견됐다. 문학동네 제공
‘당신은 방(房)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이 책의 송곳 질문처럼 들린다. 보면 볼수록 잘 몰랐다는 말이 나오게 하는 책이다. 변명하자면 익숙한 것은 궁금하지 않고, 몰라도 사는 데 큰 어려움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 책은 방을 ‘인문학의 보석상자’로 탈바꿈시켜 이런 변명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역사와 문학, 건축, 회화, 풍속, 언어학…. ‘한국18세기학회’에 속한 전문가 27명이 전하는 상식과 분석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18세기의 맛―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 ‘18세기 도시―교류의 시작과 장소의 역사’에 이은 세 번째 책이다.

책은 ‘여성의 방’ ‘응접실, 거실’ ‘부엌과 화장실’ ‘가구와 사물’ ‘패브릭’ ‘식물과 동물, 정원’ ‘책과 서재’ 등 7부로 구성돼 있다.

귀부인의 화장방(化粧房)은 매우 흥미로운 공간이었다. 귀부인의 아침 접견을 묘사한 그림들에는 애인과 물건을 팔러온 상인,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화장대에 앉아 머리 손질을 받고 있는 귀부인의 어깨에는 천이 둘러져 있다. 책에 따르면 프랑스어로 작은 천이라는 뜻의 투알레트(toilette)가 머리 손질과 화장, 화장 도구, 화장대 전체, 나아가 화장방을 가리키는 단어로 의미가 확장됐다. 이 단어가 영어화한 것이 화장실(toilet)이다. 화장방에는 실내용 변기를 보이지 않도록 둘 수 있는 캐비닛 또는 테이블 모양의 가구가 있었다.

영국의 인도 지배라는 역사의 한 단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거실 풍경도 있다. 인도 화가가 그린 ‘살림을 감독하는 임피 부인’에는 백인 여성을 중심으로 백인 집사 1명과 모자 상인, 그리고 16명의 인도 남성이 묘사돼 있다.

하지만 거실과 서재, 책상은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작가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방에서 글을 쓸 수 없었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그리 부유하지 않은 가정 형편 탓에 오스틴은 응접실 한쪽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오스틴 자택 박물관에는 그가 썼던 호두나무 탁자와 아버지가 선물한 글쓰기 상자가 있다.

책상에도 젠더(gender)적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무겁고 큰 남성용 책상은 공간의 지배자, 여러 소품을 담을 수 있는 수납공간에 초점을 둔 여성용은 개인비서 역할을 하는 일종의 조력자로 인식됐다는 것이다.

저자들이 전하는 ‘방구석 스토리’는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다양하고 섬세하다. 그들의 카메라는 거실과 서재, 식당, 정원을 디테일하게 응시하다 어느새 동서양을 오간다. 책에 등장하는 그림과 사진도 풍부하고, 해석도 깔끔하다. 불가피하게, 각 글의 호흡이 짧은 점은 아쉽다.

그럼 왜 18세기일까? 책에 따르면 17세기까지 침실과 침대도 공용일 정도로 사람들은 혼자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18세기 들어 방이 사생활을 상징하는 개인 공간으로 다시 탄생하면서 건축과 인테리어 등 여러 면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뤄졌다는 설명이다.

“우리는 방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결국 방에서 죽는다. 우리 존재의 기본 배경이자 무대인 방. 미셸 페로는 ‘방의 역사’에서 개인적이고 은밀한 방은 근대에 만들어진 경험과 사유의 단위라고 했다.” 책의 머리말 일부다. 허투루 들을 얘기는 아니다.

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18세기의 방#민은경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