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읽는 법]글에 대해 글 쓰는 일에 대한 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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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대 담배/조지 오웰 지음·강문순 옮김/108쪽·8800원·민음사

“고맙지만 사양할게. 가진 책들도 조금씩 처분하고 있어서.”

3년 전이다. 우연히 얻은 책을 살피다 그 분야를 좋아하는 선배에게 건네자 그가 그렇게 말했다. 지난해 여름 문득 그 기억을 돌이켰다. 읽을 가능성 없는 책은 장식만도 못한 가식이다. 오래전 내 방 책꽂이를 구경하며 “곰팡내가 난다”고 했던 친구의 말도 그즈음 부끄럽게 납득했다.

“여러 번 읽게 되는 책이 있고, 정신 일부를 구성하는 책이 있고,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책이 있고, 겉핥기로 대충 읽는 책이 있고, 한자리에서 다 읽었지만 한 주 정도 지나면 깡그리 잊어버리는 책도 있다.”(12쪽)

이 책의 두 번째 장 ‘어느 서평가의 고백’을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읽은 걸 포함해 네 번 읽었다. 글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자학행위를 즐기듯 읽었다. 너무 절절히 공감해서 일부를 골라 인용하기 어려울 정도다.

“상당한 양의 서평을 쓰다 보면 책 대부분을 과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기 전에는 대부분의 책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평론이 정말 정직하게 써진다면 열에 아홉의 요지는 ‘이 책은 하잘것없다’일 것이다.”(18쪽)

몇 해 전, 책면 기사를 마감하고 나와서 취재원과 점심을 먹고 있는데 당시 출판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볼륨을 낮출 틈도 없이 그가 던진 육두문자가 조그마한 식당 안을 가득 울렸다. 순화해서 옮기자면 아래와 같은 내용의 말이었다.

“야! 이 시건방진 놈아! 이따위로 ‘이 책 사서 읽지 말라’고 쓰려면 뭐 하러 책 기사를 써! 네가 책임지고 대안 찾아서 오후에 메꿔 놔!”

회사 근처 서점을 뒤져 신간을 구입해 대안 기사를 출고했다. 모든 서평이 비판을 자제해야 한다면 도대체 책 광고와 책 기사가 왜 별도로 존재해야 할까. 그때는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책 더미를 허물기 시작한 즈음부터 그런 의문을 멈췄다. 비판을 표현하는 행위도 그만뒀다. 20년 전쯤 이 책을 읽었더라면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을 그만뒀을 거다. 책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책을 쓰는 것보다 무모한 일이다.

“작가가 정확히 제때에 지조를 바꾸려면 주관적인 감정에 대해 거짓말을 하거나 그 감정을 완전히 억눌러야 한다. 어느 경우든 본인 삶의 동력은 파괴된다. 더 이상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용해온 단어들을 다시 쓰려고 하면 그 단어가 순식간에 경직된다.”(31쪽)

치유제를 가장한 진통제로 뒤범벅 착색한 지난 몇 해의 베스트셀러들을 못 본 척하기로 마음먹었을 즈음 내 글의 동력은 멈췄다. 오웰은 서평가에 대해 ‘오전 11시 반에 가운 차림으로 숙취에 망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맞는 말이다. 책 더미를 아무리 허물어도 숙취와 곰팡내는 가시지 않을 거다. 다 허물고 어떤 책이 남게 될지, 그것 하나만은 궁금하다.

disegn0@naver.com
#책 대 담배#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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