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만 가끔 찾던 썰렁한 옛 빵집, 리모델링과 리뉴얼 통해 면모일신
작년 매출 2012년 대비 10배로
“식음료 법인 세우고 매장도 확대… 100년, 200년 가는 빵집 만들 것”

초등학생 때 이후 25년여 만에 찾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태극당’의 첫인상이다. ‘菓子中의 菓子’(과자 중의 과자)라고 적힌 간판 아래 입구에는 라인프렌즈의 캐릭터 ‘브라운’ 대형 피규어가 서 있었다. 매장 안은 근현대사 박물관 같았다. ‘納稅(납세)는 國力(국력)’처럼 1970년대식 구호들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태극당이 운영하던 목장 풍경을 담은 조각 작품이 한쪽 벽을 채우고 있었다. 빵 진열대와 의자에도 세월의 흔적이 살아있었다. 빵집인데 눈이 먼저 즐거웠다.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태극당을 ‘뉴트로(새로운 복고)의 성지’로 부활시킨 주인공 신경철 전무(35)와 신혜명 브랜드전략팀 부장(39)을 만났다. 둘은 창업주 고 신창근 대표의 손주들이다.
○ ‘태극당집 손자’
신경철 전무는 어린 시절에 대해 “다들 ‘태극당집 손자’라고 불렀다”고 회상했다. 할아버지 덕분에 풍족하게 자랐다는 뜻이었다. 1976년 서울에서 가장 많은 재산세를 낸 인물이 할아버지였다.

○ “지키기 위해서 바꿨다.”
태극당을 살리기 위해 큰누나인 신혜명 부장 등 가족들이 나섰다. 먼저 젊은 손님을 끌기 위해 마케팅을 벌였지만 낡은 건물이 발목을 잡았다. 전기 설비가 너무 오래돼 새 오븐을 들여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화장실에는 온수가 나오지 않았고 4층 건물인데도 엘리베이터가 없어 지게로 빵을 날라야 했다.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태극당 브랜드 리뉴얼도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통상 리뉴얼은 낡은 이미지를 덜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지만 태극당은 옛것을 지키는 데 집중했다. “가족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최고의 태극당은 가장 태극당스러울 때이며, 태극당은 가족뿐만 아니라 서울의 문화유산이니 우리가 함부로 바꾸면 안 된다는 점이었습니다.”(신 전무)
건물 리모델링은 ‘복원’에 가까웠다. ‘새것을 사는 게 더 싸다’는 인테리어 업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개업 당시 설치한 대형 샹들리에를 떼어 금속부분만 교체하고 다시 걸었다. 나무 안내판, 빵 진열장까지 모두 그대로 뒀다. 다만 손님이 진열장에서 빵을 고르면 직원이 꺼내주는 방식을 버리고 손님이 빵이 직접 골라 담도록 하는 등 시대 변화에 따라 꼭 필요한 부분은 바꿨다. 브랜드 리뉴얼은 신 부장이 주도했다. 미술 전공을 살려 제품마다 제각각이던 로고를 다듬고 통일했다. 태극당 서체를 만들고 홈페이지도 바꿨다. 할아버지 때 만든 ‘빵아저씨’ 캐릭터를 활용해 할아버지가 주인공인 동화책도 냈다. 브랜드에 단골들만 아는 태극당 이야기를 입히는 과정이었다. “태극당에 대한 추억이 없는 젊은 세대도 공감하도록 만들려고 했습니다.”(신 부장)
○ ‘뉴트로 성지’로 부활한 태극당

태극당은 2018년 서울 을지로점, 지난해 인사점을 열었다. 매출은 2012년에 비해 10배로 늘었다. 올해는 추가로 매장을 낼 계획이다. 신 부장은 “무엇보다 빵이 변함없이 맛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모나카, 단팥빵, 카스텔라 등 맛은 물론 모양, 포장지까지 옛것 그대로다. 1960~70년대 입사한 제과제빵 장인들이 여전히 태극당에서 빵을 만들고 있는 데다 경영난에도 기존 메뉴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 전무는 카스텔라 안에 사과잼을 넣은 ‘오란다빵’에 얽힌 일화를 들려줬다. 빵이 크고 만들기도 까다로운 오란다빵은 2012년 입사 초기만 해도 인기가 없는 메뉴였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매일 2, 3개씩 꾸준히 이 빵을 만들었다.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 ‘왜 계속 만드는지’ 여쭤봤더니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이것만 찾는 할머니 손님이 한 분이 계신다고요.” 오란다빵은 현재 태극당의 인기 메뉴 중 하나로 꼽힌다.
○ 백년 이상 가는 빵집으로
신 전무는 지난해 말 식음료 유통법인 ‘농축원’을 설립하고 농축원 카페와 레스토랑을 열었다. 다른 식음료 분야로 확장하는 동시에 태극당을 더 탄탄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태극당은 법인이 아닌 개인사업자로 운영하다 보니 세금 부담이 크고 사업 확장 등 경영상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향후 태극당도 법인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손주 놈이 태극당 말아먹었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엄청 노력했습니다. 앞으로 태극당이 100년, 200년은 버틸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데 집중할 겁니다. 세월이 흘러도 태극당에 오면 ‘우와’ 하는 탄성이 나오는 그런 빵집으로 남기는 게 목표입니다.”(신 전무)
오래된 빵집에서는 빵만 파는 게 아니었다. 단골들은 태극당에서 추억을 찾고 이곳이 처음인 젊은 사람들은 새로운 기억을 만들었다. 인터뷰를 마친 뒤 태극당의 시그니처 메뉴인 카스텔라를 샀다. 25년 전 부모님이 사줬던 빵이었다. 다른 빵집 카스텔라보다 유독 크고 묵직했다. 빵 하나를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때 묵직한 느낌은 그대로였다.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