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자막’ 누가 만들까? 어둠속에서 땀흘리는 또 다른 배우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4일 17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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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 스페이스 바 1500번 누르기는 기본, 한 공연을 수십 번 ‘강제 관람’해요. 공연 중 화장실을 가면 안 되기 때문에 웬만하면 물도 마시지 않습니다. 너무 집중하느라 막이 내리는 순간 탈진해버려요.”

해외 공연 팀이 내한하면 빠지지 않는 이들이 있다. ‘꼭’ 필요한 인원이지만 절대 무대에선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관객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빛을 발한다. 배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이 무대 뒤 콘솔에서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는 이들. 바로 ‘자막 오퍼레이터’다.

일반 관객에게 이들의 직업은 낯설다. 흔히들 “자막은 자동으로 나오는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실은 공연 자막은 영화와 달리 100% 사람이 현장에 띄우는 ‘수작업’이다. 라이브 공연은 언제나 돌발 변수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공연계에서 자막 오퍼레이터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김미희(36) 이호진(32) 여태민(30) 부소정 씨(25)를 만났다. 그들의 작업은 공연 한 달 전부터 시작된다. 먼저 기본 원문과 번역 대본을 꼼꼼히 읽는다. 문장도 대략 파악해야 하지만, 전체 흐름도 숙지해야 한다. 미묘한 표현은 번역가와 논의하기도 한다. 그렇게 미리 자막 슬라이드를 만드는데, 영화처럼 긴 자막을 쓸 수 없어 두 줄 이내로 자른다. 그렇게 만든 슬라이드는 공연 당 1300~2000장에 이른다.
9일 개막을 앞둔 뮤지컬 ‘썸씽로튼’에 참여하는 여태민 씨는 “공연이 시작되면 귀로 영어를 듣고, 눈으로는 한글 자막에 집중하며 수천 장을 넘겨야 한다”며 “동시통역만큼은 아니라도 타이밍을 조율해야 해 느슨해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지방투어를 따라다니며 수십 번 작품을 강제 관람하면 대사, 넘버를 다 외우는 수준이다.”(뮤지컬 ‘라이온킹’의 이호진 씨)

자막 오퍼레이터에 외국어 실력은 당연히 필수다. 뮤지컬 ‘플래시댄스’를 비롯해 2014년부터 대형공연을 자주 맡은 김미희 씨는 “대사의 뉘앙스, 어감, 박자도 파악해야 수준 높은 오퍼레이팅이 가능하다”고 했다. 영어·프랑스어가 함께 사용된 연극 ‘887’의 부소정 씨는 “두 언어가 한글과 어순이 달라 대사에 맞게 슬라이드 순서를 잡는 게 관건”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뭣보다 대사 타이밍을 맞추는 ‘순발력’을 주요 덕목으로 꼽았다. 이호진 씨는 “웃음을 유발해야 하는 타이밍에 자막이 적절하게 나가지 않으면 큰일”이라고 말했다. 여태민 씨는 “배우가 입을 벌리거나 움직이는 시점 등 아주 작은 특징도 꼼꼼히 노트에 적어 놓는다”고 했다.

그렇게 준비해도 예기치 못한 상황은 벌어진다. 가끔 배우가 즉흥적으로 애드리브를 치거나 대사를 건너뛰기도 한다. 김미희 씨는 “재빨리 자막이 없는 ‘블랭크(검은색 슬라이드)’ 화면을 띄워 자막과 대사가 엇나가는 일을 막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사랑한다고 입을 모았다. 공연에 대한 애정이 넘치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는 배우의 동작을 흉내 내고 노래도 따라하면서 어둠 속에서 홀로 공연을 즐기는 또 다른 배우인 것 같아요.” (김미희)

“‘자막 덕분에 작품 내용을 잘 이해했다’는 후기에 저도 모르게 뿌듯한 마음이 들어요.” (부소정)

김기윤기자 pe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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