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과거를 손에 쥔 권력, 대중을 길들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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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윤상옥 지음/284쪽·1만5000원·시공사

차우셰스쿠-히틀러-무솔리니 등 독재자들 민족주의적 환상 자극… 하나된 대중 정치적으로 이용
최근 세계적으로 민족주의 재부상… 권력층의 역사왜곡 경계해야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한 거리에 그려진 트럼프와 푸틴. 트럼프는 미국의 도덕성과 책무를 강조하는 ‘미국 예외주의’ 전통을 버리고 미 국민의 풍요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웠다. “미국은 러시아와 다를 바 없다” “푸틴을 존경한다” 등의 발언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시공사 제공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한 거리에 그려진 트럼프와 푸틴. 트럼프는 미국의 도덕성과 책무를 강조하는 ‘미국 예외주의’ 전통을 버리고 미 국민의 풍요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웠다. “미국은 러시아와 다를 바 없다” “푸틴을 존경한다” 등의 발언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시공사 제공
루마니아는 고대 훈족부터 게르만족 등 숱한 민족의 이동 경로에 자리 잡고 있었다. 5세기부터 약 1000년 동안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 뿐 아니라 14세기 다시 등장했을 때도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간섭과 지배를 받으며 오랜 기간 혼돈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이런 루마니아에 최근 한 사이비 역사학자의 학설이 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부상 중이다. 로마인의 피가 섞이기 전 고대 다뉴브강 하류에 살았던 다키아인에서 민족 정체성을 찾는 사관인데, 억측과 과장이 난무한다. ‘다키아가 로마를 지배했었다’거나 ‘다키아인은 기독교 탄생 전 이미 기독교를 믿었다’고 한다. 주변국에서 비난이 쏟아지지만 기성 역사학자들은 여론이 무서워 말을 아낀다. 반박했다간 무자비한 마녀사냥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힘든 반지성적 현상이지만 여기엔 사실 이 나라 과거의 더 깊은 상처가 연관돼 있다. 20세기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인에게 민족주의적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 왜곡했던 비뚤어진 역사관이 낳은 후유증이기 때문이다. 독재 체제는 종말을 맞았지만 많은 국민은 유럽의 약소국이란 콤플렉스를 잠시나마 잊게 해줬던 그 환각에서 깨어날 준비가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민족주의적 색채를 지운 새 역사 교과서에 야당은 “제국주의에 무릎 꿇었다”며 교과서를 불태우고 격렬한 폐지 시위를 벌였다.

사실 차우셰스쿠뿐만이 아니다. ‘아리안 신화’로 무자비한 인종 탄압과 독재를 정당화시켰던 히틀러, 로마 제국의 영광에 집착하며 파시즘을 정당화한 무솔리니처럼 우리가 익히 아는 독재자들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나 된 대중을 지지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그들의 전략은 폭로됐고 독재도 끝난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지성과 자유주의의 시대라는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이들의 망령이 어른대고 있기 때문이다.

외교관 출신으로 현재 유엔 인권외교를 담당하고 있는 저자는 이렇게 최근 세계 주요 국가에서 부상하고 있는 정치적 갈등이 과거의 역사 왜곡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민족주의의 재부상이다.

역사적으로 권력이 가장 손쉽게 이용해온 정치적 무기는 민족주의였다. 이것이 미국에선 트럼프의 백인 민족주의 ‘트럼피즘(Trumpism)’, ‘미국 우선주의’로 변형돼 나타나고 있다. 중국에서는 시진핑 주석의 ‘중국의 꿈’이란 슬로건으로 등장했다. 미중 양강만 그런 게 아니다. 힌두 민족주의를 내세워 불합리한 신분제도는 물론이고 폭력, 탄압까지 정당화시키고 있는 인도나 서구화 실패의 피해의식을 과장해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동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든 그 나라의 역사 속에는 기득권 계층이나 독재정권이 국민에게 심으려 한 ‘같은 기억’이 있다. 공산체제의 붕괴 위협 속에서 덩샤오핑이 택했던 애국주의가 현재 시진핑 체제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에 대한 집단의 기억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권력은 늘 강한 유혹에 빠진다. 지지층 결집에 방해가 되는 기억은 배제하고, 필요한 기억은 키우고 싶어 한다. 책은 해외 상황을 담고 있지만 우리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역사를 지배하려 했던 권력의 궤적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증오로 점철됐던 과거의 우를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한 또 다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윤상옥#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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