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전쟁과 참사, 그리고 고통스러운 증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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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없는 전쟁의 목격자나 참전자의 이야기를 통해 살아나는 역사. 그렇다. 나는 바로 그런 역사가 알고 싶다. 그런 역사를 문학으로 만들고 싶다.―‘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문학동네·2015년) 》
 
좁은 전셋집에 불어나는 책을 감당할 길이 없어 다 읽은 책은 소장할지를 판별한 뒤 중고 서점에 팔고 있다. 201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 두 권, ‘체르노빌의 목소리’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그렇게 내 손을 떠났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겪은 이들의 육성을, ‘전쟁은…’은 제2차 세계대전에 소련군으로 참전한 여성들의 육성을 담은 책이다. 증언자들의 회상을 그대로 받아쓴 문장들은 언뜻 ‘이게 노벨 문학상감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또 그들의 고통을 생생히 담고 싶다면 작가가 사건을 취재해 논픽션의 형태로 소화하거나, 어떤 인물의 이야기를 극화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작가의 방식에는 나름의 효과가 있다. 한 줄 한 줄 읽다 보면 그 안에 담긴 고통이 살갗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시간이 오래 지난 만큼 증언자들의 기억은 때로는 끊어지고, 또 비어 있다. 작가는 완벽하지 않은 날것의 문장으로 증언자들의 호흡까지 담는다. 한 권을 쓰기 위해 증언자 수십, 수백 명을 일일이 찾아가 만나며 10년 이상 공을 들였고, 이 모든 일을 정부 탄압 아래 했다는 점을 알고 나면, 쓰고 출판하는 과정 전체에 노벨 문학상이 주어졌다고 이해하게 된다.

인상 깊게 읽었는데도 남겨두지 않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다시 읽지 않을 것 같아서다. 책을 펼치면 첫 생리가 시작한 날 총을 맞아 다리를 잃은 소녀라든가, 원전 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이에게 장애가 생길까 봐 전전긍긍해야 하는 젊은 부인 얘기 같은 일화들이 빼곡하다. 수십 년분의 고통이 농축돼 있는 이 책을 또다시 읽을 용기가 없었다. 퇴근 뒤에는 침대에 엎드려 느긋하게 즐길 만한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이 책 두 권을 중고 서점으로 보내도록 만들었다. 책장에 꽂힌 것만 봐도 그 생생한 육성이 떠오를까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겁이 날 정도로 엄격하게 진실 그대로를 담은 책이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전쟁#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문학동네#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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