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잔향]세탁기 위 역사책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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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때 역사책 읽기를 좋아했다. 중국과 로마를 야트막하게 편식했을 뿐이지만 그럭저럭 잘 집어든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시절 독서로 인해서 머릿속에 희미하게나마 깔려 있을 역사 관련 정보에 대해 요즘 가끔 의혹이 든다. 여기저기 밑줄까지 쳐 가면서 들여다본 그 역사책들은 어떤 관점에서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 의해 쓰인 글이었을까. 실제 벌어진 사실과 내가 읽은 기록의 간극은 어느 정도일까.

세탁기를 돌리며 틀어놓은 케이블 TV 방송에서 역사를 주제로 내건 강연 프로그램이 거듭 재생됐다. 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는 스타 학원 강사가 절묘한 손동작을 섞어가며 내 의혹을 몰아세우듯 딱딱 떨어지는 단언을 이어갔다.

“신라 신문왕은 대단한 영웅이 아니었어요. 그는 겁쟁이였습니다.”

“의자왕은 성군이었습니다. 삼천궁녀 얘기는 다 거짓말이에요.”

책의 맹점은 형식의 명징함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책은 활자를 모아 정렬해 더없이 확실해 보이는 구성을 갖춤으로써 내용에 대한 신뢰도를 구축한다. 모든 책은 자기 안에 담긴 내용이 옳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 반대로 다른 활동 없이 오로지 책만 읽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시간도 괴롭지만, 어떤 사안에 대해 한 방향의 책만 탐독한 사람과의 대화 역시 매한가지로 곤혹스럽다.

ⓒ오연경
10대가 되기 전에 만화책 다음으로 많이 읽은 책은 역사에 이름 남긴 위인들 이야기였다. 그때 알게 된 사람들 중에는 지금 결코 위인이라 여겨지지 않는 이가 적잖다. 책은 진리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지만, 모든 책이 진리를 담고 있는 건 아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역사책#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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