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性범죄 피해자 두 번 죽이는 ‘침묵하는 사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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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은 강간이다/조디 래피얼 지음·최다인 옮김/340쪽·1만5000원·글항아리
◇거리에 선 페미니즘/고등어 등 지음/212쪽·1만2000원·궁리

성폭행 당한 딸을 대신해 복수에 나선 엄마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돈 크라이 마미’의 한 장면. 줄리언어산지 위키리크스 창립자,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성범죄를 저질렀을 때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진 오히려 피해자의 약점이 집중 부각됐다. 동아일보DB
성폭행 당한 딸을 대신해 복수에 나선 엄마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돈 크라이 마미’의 한 장면. 줄리언어산지 위키리크스 창립자,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성범죄를 저질렀을 때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진 오히려 피해자의 약점이 집중 부각됐다. 동아일보DB
 2008년 13세 소말리아 소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수도 모가디슈에 사는 할머니를 만나러 가다 세 남자에게 강간당했다. 소녀가 보호를 요청한 당국은 간통 혐의를 씌우고 사형을 선고했다. 소녀는 경기장 바닥에 목까지 파묻혔고, 10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50명의 남자가 돌을 던졌다. 

 충격적인가. 하지만 ‘강간은 강간이다’의 저자는 강간 피해자를 비난하고 처벌하는 수백 년 묵은 관습이 극단적으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2007년 미국 공군이던 19세 여성 커샌드라 허낸데즈는 파티에서 동료 공군 세 명에게서 강간을 당했다고 신고했다. 그가 법률자문단에서 가혹한 심문을 받은 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고소를 포기하자 공군은 그를 음주와 풍기문란으로 법정에 세웠다. 남성들은 풀려났다. 두 사건은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여성 폭력 전문 변호사인 저자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강간이 삶을 얼마나 오래, 갈가리 찢어놓는지를 보여준다. 첫 데이트에서 강간당한 라일리는 수치심과 공포에 시달리며 “강간은 사랑을 표현하는 능력을 빼앗는 행위”라고 절규한다. 남성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강간당한 트레이시는 스스로를 “깨진 도자기처럼 고칠 수 없는 존재라고 느낀다”고 토로한다.

 미국 질병관리본부(CDC)에 따르면 2010년 조사에서 18세 이상 미국 여성의 12.3%가 평생 한 번 이상 강간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모르는 사람에게 당한 경우는 전체 피해자의 14%에 불과했다.

 허위 강간 신고율은 2∼8%인데도 이 수치를 부풀리며 남성을 음해하는 수단으로 여성들이 강간을 이용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일부 페미니스트조차 데이트 강간 문제를 제기하는 건 힘겹게 이룬 여성의 성적(性的) 자유를 가로막는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가해자와 친했거나 술이나 약물을 복용하면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 강간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해결하기 만만치 않은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구체적인 사례와 피해자들의 고통스러운 고백은 강간이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엄연한 범죄임을 거듭 확인시켜 준다. ‘미성년자와의 섹스’ ‘합의되지 않은 섹스’로 표현하지 말고 ‘강간’이라고 말하라는 저자의 당부도 호소력을 지닌다. 무심코 사용하는 단어도 강간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원제는 ‘Rape is Rape’.

 ‘거리에 선 페미니즘’은 올해 5월 벌어진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같은 달 20일 한국여성민우회가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서 마련한 ‘여성 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에서 42명이 8시간 동안 발언한 내용을 담았다. 지하철, 버스에서 옆자리 남성에게 추행을 당한 여성, 밤늦게 택시를 타자 기사가 “남자친구랑 이렇게 늦게까지 뭐하고 놀아?”라고 물으면서 계속 힐끔거리며 쳐다봐 두려웠다는 여성, 친오빠가 자신을 지속적으로 성추행했지만 부모는 용서하라며 오빠가 기죽을까봐 걱정하는 걸 보며 자란 여성….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성이라면 낯설지 않은 경험이다. 피해자의 무너진 삶보다 가해자가 살아갈 삶을 걱정하는 사회가 두렵다는 말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여성 폭력에 침묵하지 말자는 선언문이 가슴에 와 닿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 발언자가 소개한 미국 언론인 밀턴 마이어의 글귀를 많은 사람이 기억하기를 소망한다.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강간은 강간이다#조디 래피얼#거리에 선 페미니즘#고등어#성범죄#강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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