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책벌레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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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출판평론가
표정훈 출판평론가
 지나치게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데만 열중하는 사람을 놀림조로 책벌레라 이른다. 전통 동아시아에서는 서광(書狂), 서치(書癡), 서음(書淫), 서전(書癲)으로 일컬었다. 서양에서는 서적광, 애서광 등으로 풀이되는 비블리오마니아(bibliomania)라는 말이 널리 쓰였다. 이 말은 영국의 의사 존 페리어(1761∼1815)가 처음 만들었고, 1809년 토머스 딥딘이 펴낸 ‘비블리오마니아 또는 서적광’이라는 책을 통해 널리 퍼졌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북웜(bookworm)’은 실제로 책이나 종이에 서식하는 작은 벌레를 뜻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먼지다듬이벌레가 있다. 따뜻하고 습한 환경을 좋아하는 벌레로, 사람에게 특별한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다만 알레르기나 아토피 환자를 괴롭히는 수는 있다. 책벌레보다는 곰팡이가 책을 훼손하는 주범이며, 책벌레는 곰팡이를 먹고 산다.(‘권오길이 찾은 발칙한 생물들’)

 조선 시대에는 사고(史庫)에 보관된 전적을 정기적으로 바람에 쏘이고 햇볕에 말렸다. 이를 포쇄(曝쇄)라 하는데, 숙종 때 문신 신정하(1680∼1715)는 1709년 포쇄관으로 태백산 사고를 찾은 경험을 시로 남겼다. ‘두 번 절하고 자물쇠 열어 포쇄를 하니, 상자가 서른여섯 개라. 해가 중천에 이르러 마침 부는 바람에 책장을 펼치니, 날아 지나가는 새가 책에 그림자를 떨구는구나.’

 오늘날 책에 쓰이는 용지에는 미세한 돌가루 성분이 들어 있는 데다가 특수 처리된 경우도 많아서, 습기가 많이 찬 경우가 아니라면 꽤 오래된 책에서도 책벌레를 찾기 힘들다. 곤충 책벌레는 사라져가고 사람 책벌레만 남은 셈이라 할까. 하지만 ‘사람 책벌레’도 점점 더 빠르게 희귀종이 되어 가는 듯하다.

 1년에 단 한 권이라도 책을 읽은 사람의 비율인 독서율은 2013년 71.4%에서 2015년 65.3%로 급감하여, 1994년 ‘국민 독서 실태조사’ 시작 이래 최저를 기록했다. 성인 월평균 독서량도 2009년 0.9권에서 꾸준히 떨어져 2015년에는 0.76권이었다. 1999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공익광고가 이미 책벌레 멸종을 경고했다.

 “우리나라에는 책벌레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성인 남녀 월평균 독서량 0.8권. 바쁘다는 핑계로, 귀찮다는 이유로 우리나라는 어느새 한 달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책은 시간 날 때 읽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읽는 것! 다시 책벌레로 돌아갑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책벌레#독서#북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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