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선을 거부한 ‘주류 디자이너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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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민미술관 ‘그래픽 디자인, 서울’전

월간지 ‘디자인’의 전은경 편집장과 그래픽디자이너 원승락 씨가 작업한 ‘(아웃 오브) 포커스’. 기사를 통해 인터뷰한 그래픽디자이너들의 사진 72점을 모아 한 벽면에 걸었다. 얼굴과 인물정보 텍스트는 아크릴을 잘라 붙여 가렸다. 그럼에도 누구인지 짐작하게 하는 정보들이 사진 배경에 남겨짐을 보여준다. 일민미술관 제공
월간지 ‘디자인’의 전은경 편집장과 그래픽디자이너 원승락 씨가 작업한 ‘(아웃 오브) 포커스’. 기사를 통해 인터뷰한 그래픽디자이너들의 사진 72점을 모아 한 벽면에 걸었다. 얼굴과 인물정보 텍스트는 아크릴을 잘라 붙여 가렸다. 그럼에도 누구인지 짐작하게 하는 정보들이 사진 배경에 남겨짐을 보여준다. 일민미술관 제공
전시 주제 소식을 오래전에 듣고 두 가지 부정적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미술계 전반에 널리 퍼진 ‘일민미술관 전시는 어렵다’는 선입견. 두 번째는 지난해 8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그래픽디자인전의 어수선한 기억이다.

결론부터 쓰자면 두 염려 모두 괜한 오지랖이다. 5월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전 기획자로 초청된 그래픽디자이너 김형진 최성민 씨는 “이 전시가 최근 10년간의 그래픽디자인 ‘걸작선’처럼 여겨지지 않도록 경계했다. 그런 의도라면 책을 한 권 정리해 내거나 웹페이지를 만드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불쾌한 소외감을 안길 위험이 큰 전문용어나 관념어의 불친절한 나열, 무의미하고 안이한 디자인 결과물이나 카탈로그 무더기는 치워냈다. 전문 영역 밖 관람객이 가벼운 마음으로 정갈한 이미지 제안을 슥 훑어볼 수 있도록, 공간 여백을 넉넉히 뒀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전시실에는 디자인 전공자로 보이는 젊은 학생들이 많이 눈에 띈다. 지난 주말 전시실을 찾은 한 독립큐레이터는 “통상적 회화 또는 조각 전시와는 관람객 구성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고 했다. 기획자들은 우수작 선정 리스트로 받아들여지기를 꺼렸지만, 이번 전시는 디자인에 관심을 둔 이들에게 ‘잘나가는 선배들’의 자취를 한목에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임에 틀림없다.

건축사무소 ‘설계회사’가 전시실 3개 층을 수직으로 관통하듯 설치한 ‘빌딩’. 콘크리트를 얇게 입힌 종이 103장을 쌓아올렸다. 기획자 최성민 씨는 “독립출판의 미심쩍은 성취가 허물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읽힌다”고 말했다.
건축사무소 ‘설계회사’가 전시실 3개 층을 수직으로 관통하듯 설치한 ‘빌딩’. 콘크리트를 얇게 입힌 종이 103장을 쌓아올렸다. 기획자 최성민 씨는 “독립출판의 미심쩍은 성취가 허물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읽힌다”고 말했다.
전시의 기본 틀은 각 전시실 초입에 배치한 디지털 색인 페이지 ‘101개의 지표’다. 참여 작가 12팀은 유의미한 결과물로 선별된 디자인 작업 101개에 조금씩 연관돼 있다. 전시 작품은 이들이 기존 디자인 결과물에 변형을 더해 내놓은 새로운 무언가다. 디자인 잡지 인터뷰 사진에서 인터뷰 대상의 얼굴과 설명 텍스트에 아크릴판을 잘라 붙여 가리거나, 전시홍보용 인쇄물을 재료로 아카이브 형태 설치물을 구성하기도 했다.

편집자, 번역가, 시인으로 구성된 창작집단 ‘잠재문학실험실’은 텍스트 인쇄 디자인 작업 결과물 한 면의 일부 단어를 골라 임의로 조합해 ‘시’를 만들었다.

“나를 멈추게 하는 것은/다다를 수 없는/그러길 바라는/기필코 불행해야 한다는/내가 앓는/가장 지독한 병이다….” 정색하고 꼼꼼히 들여다보며 나름의 의미를 짚어낼 수도, 이미지만 후루룩 살펴볼 수도 있다.

하지만 3층 전시실의 동영상 강의 연작 ‘걸작이로세!’와 네트워크 프로젝트 ‘스몰 월드: 그래픽 디자이너’는 약간의 의구심을 남긴다. 자연스러운 편향성을 시인하며 이어지던 전시 흐름이 자부심과 연대감의 또렷한 표출로 맺어진 것은 아쉽다. 전시를 관람한 대형 사립 미술관 관계자는 “스스로 비주류라 일컫지만 누구에게나 주류라고 받아들여지는 디자이너들이 자아를 대하는 가치관에서 묘한 균열이 읽혔다”고 말했다. 02-2020-2038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일민미술관#그래픽 디자인 서울#101개의 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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