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북카페]대기업에 좌우되는 미국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7일 03시 00분


코멘트

리 드러트먼 저 ‘미국 기업들은 로비 중’

1991년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우주정거장’ 건립 프로젝트는 계획된 예산보다 더 많은 돈이 투입됐지만 예정된 시기보다 계속 늦어졌다. 정치인들은 “(우주정거장은) 우주에 떠 있는 1200억 달러(약 143조 원)짜리 ‘빈 깡통’이 될 것”이란 비판을 쏟아냈다. 의회는 추가 예산 승인을 거부할 태세였다. 이때 이 프로젝트의 핵심 계약자인 보잉사가 나섰다. 대대적인 ‘로비’를 시작한 것이다. 수학과 과학 교사들을 총동원하고 심지어 캐나다, 일본, 일부 유럽 국가 정부까지 움직여 ‘우주정거장 건립이 왜 계속돼야 하는지’를 설파하고 미 의회를 압박했다. 결국 이듬해 미 상원과 하원은 “우주정거장은 미국 미래의 막대한 빚이 될 뿐”이란 반대 세력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예산 지원 법안을 가결시켰다. 보잉의 한 전직 로비스트는 “이 ‘쾌거’는 보잉 로비의 틀을 바꿔 놓았다”고 회고했다. 1980년대까지 미 대기업들의 대(對)의회 로비는 ‘우릴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놔두세요’라는 식의 수비형이었지만 보잉 우주정거장 사례를 계기로 ‘정부나 의회의 의사결정을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로 만드는’ 공격형 로비가 본격화했다는 설명이다. 보잉의 이익을 위해 워싱턴 정가를 누비는 로비스트는 1981년엔 9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00명이 넘는다(2012년 기준 115명).

정치개혁 이슈를 연구하는 싱크탱크 ‘뉴아메리카’의 리 드러트먼 선임연구원이 내놓은 신간 ‘미국 기업들은 로비 중’은 회사들이 정치(정부 규제나 공공정책)를 기업 활동의 방해나 위협 요인이 아닌, 적극적 기회로 여기게 되는 과정과 이유를 연구한 책이다. 저자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워싱턴에 ‘(로비활동을 위한) 사무소’를 둔 기업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보잉처럼) 로비스트가 100명 이상인 대기업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어떤 기업은 ‘현행 법규를 그냥 유지해야 한다’고 로비하고, 다른 기업은 ‘새로운 규칙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로비한다. ‘로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정치 고착상태도 더욱 심화한다. 상충된 목소리가 늘 충돌하니 의회 입법과정도 더 복잡해지고 시간도 더 걸린다. 전문성으로 무장한 ‘기업 로비스트’에 대한 정치인이나 정부 관료의 의존도만 커진다. 결국 ‘로비스트 세상’이 된다. 저자는 “로비스트들은 경제적 이익(높은 임금)뿐만 아니라 ‘우리(로비스트)가 정책 결정 과정을 좌지우지하는 중심 인물’이라는 심리적 보상까지 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로비스트들이 기업에 로비 기술을 전수하고, 로비를 통한 정치적 기회를 소개하면 회사 경영자들은 로비의 혜택에 눈뜨고 로비를 더욱 강화하는 ‘기업 로비의 튼튼한 생태계’가 형성된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글로벌 정보기술(IT) 공룡’이라고 불리는 구글이 지난해 로비스트들에게 지불한 비용만 1680만 달러(약 200억 원)에 이른다. ‘IT 공룡’이 ‘로비 공룡’이기도 한 셈이다.

쿠바 이민자 출신의 미 공화당 대선주자인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플로리다) 등은 “미국 정치가 ‘로비스트를 고용할 수 있는 사람(기업)들의 이해’만 대변하고 있다”고 역설하곤 한다. 저자는 이런 주장을 각종 통계와 객관적 자료, 전현직 로비스트들의 생생한 증언 등을 통해 입증한다. 작고 촘촘한 글씨의 두꺼운 책(269쪽 분량)은 술술 읽히는 대중서는 아니다. 그러나 로버트 리치 전 노동부 장관은 “(대기업들에 좌우되는) 미국 정치를 걱정하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평가했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대기업#좌우#미국정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