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은 돌아가라” 재일교포 소년의 성장소설 ‘두더지와 김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9일 14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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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다소 줄었지만 작년까지 도쿄(東京) 시내에서 가끔 혐한 시위 현장을 만날 수 있었다. 2차대전 당시 입었을 법한 군복을 입은 이들이 “조선인은 돌아가라”고 외칠 때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하면서 웃어 넘겼다.

하지만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재일교포들이다. 일본에 터를 잡고 차별과 멸시 속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혐한 시위대는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존재다. 그리고 일본이 과거로 돌아갈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재일교포 소년의 성장담을 다룬 소설 ‘두더지와 김치’는 도쿄의 한류타운 신오쿠보(新大久保)에서 벌어진 혐한 시위 현장에서 시작한다. 50대 중반인 주인공 이호일은 시위를 보면서 40여 년 전 자신을 떠 올린다.

배경은 1973년. 그는 아버지의 빚 때문에 오사카(大阪)에서 홋카이도(北海道)에 떠밀리듯 전학 온 처지다. 같은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는 하지만 오사카의 조선학교와 시골 일본학교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어머니는 그에게 “조선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이라며 정체를 숨기라고 얘기한다.

이후 좌충우돌 학교생활이 펼쳐진다. 호일은 대도시에서 온 것을 자랑하다가 사인볼을 보여 달라는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집을 치우고 친구들을 들여놓지만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진다. 일찍 온 할머니는 그를 한국식 이름으로 부르고 호일은 “오사카 사투리라 그렇다”며 필사적으로 해명한다. 김치를 오사카 음식이라고 속여 넘기고, 벽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는 조상을 그린 것이라고 둘러대는 모습을 보면 서글픈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계속 속일 수는 없는 법. 어느 날 학교 칠판에 ‘구니모토 고이치(주인공의 일본식 이름)는 조선인. 빨리 조선으로 돌아가는 게 좋다. 돌아가지 않으면 쫓아낼 것’이라는 글이 씌여진다. 설상가상으로 담임교사는 “중대 발표를 하겠다. 구니모토 군은 조선인이다. 지금까지 숨겨서 미안하다”며 학생들에게 사과를 한다. 앞으로 불려나온 호일에게는 위로인지 뭔지 모를 말을 해서 눈물을 쏟게 한다.

호일의 유일한 희망은 “구니모토 군이 조선인이라는 얘기를 듣고 기뻤어.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게 꿈이니까”라는 다정한 말을 건네는 마에다라는 여학생이다. 이 여학생의 아버지는 마을 선거에 나서는데 상대는 조선인을 싫어하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남학생의 아버지다. 호일은 선거에서 마에다의 아버지가 승리하도록 기상천외한 계획을 생각해 낸다.

이 소설은 1967년 홋카이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작가 박번이 본명으로 처음 쓴 소설이다. 그 전에는 통명(일본식 이름)인 시노시타 시게루(木下繁)라는 이름으로 아동 소설을 쓰던 작가다. 제목에 포함된 두더지는 작품의 주요 소재이면서 재일교포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의 장점은 살면서 직접 보고 들은 재일교포 차별의 실태를 유머러스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하던 북한으로 돌아간 재일교포들이 편지에 몰래 실상을 전하는 모습, 계절마다 김치를 담그고 이사 갈 때는 김치 독을 꼭 챙기는 재일교포 가정의 생활 풍습 등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앞뒤에 다소 늘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옥의 티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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