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亡國 책임론’에 유폐된 ‘제국의 꿈’을 許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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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주년, 대한제국 재조명 활발
국립중앙박물관 테마 기획전 열어…덕수궁 석조전 ‘역사관’ 복원 개장
근대화 과정 평가는 여전히 논란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한제국, 근대국가를 꿈꾸다’ 테마전에 전시되고 있는 대한제국 국새 ‘대원수보’(위 사진)와 1902년 무렵 그려진 고종황제 어진(아래 왼쪽 사진). 미술관으로 쓰이다 최근 복원된 덕수궁 석조전 내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동아일보DB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한제국, 근대국가를 꿈꾸다’ 테마전에 전시되고 있는 대한제국 국새 ‘대원수보’(위 사진)와 1902년 무렵 그려진 고종황제 어진(아래 왼쪽 사진). 미술관으로 쓰이다 최근 복원된 덕수궁 석조전 내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동아일보DB

2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테마전시장. ‘대한제국, 근대국가를 꿈꾸다’ 전시회에 발을 막 들여놓은 일부 관람객이 “이게 여기 왜…”라는 반응을 보였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 직전인 1910년 뤼순감옥에서 쓴 단지(斷指) 유묵(遺墨)이다. 낙관 대신 무명지가 잘린 왼손을 먹물로 찍고 그 위에 쓴 ‘대한국인 안중근’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대한제국과 안중근. 얼핏 관련이 없어 보이는 조합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안 의사는 거사 직후 심문에서 “군인이 적장을 죽이는 건 당연하다”며 자신이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 신분임을 강조했다. 안 의사를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려는 일본 측 시도에 대한 정면 대응이었다.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망국(亡國) 책임론’에 밀려 한동안 폄훼된 대한제국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번 전시에서 대한제국의 근대화 시도를 보여 주는 당시 화폐와 서양식 병원인 대한의원 개원 칙서, 궁내부(宮內府) 현판 등 관련 유물 110점을 선보이고 있다.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이화 무늬를 새긴 의례용 칼. 1906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이화 무늬를 새긴 의례용 칼. 1906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근대화에 대한 고종의 의지를 반영해 서양식 건축 양식으로 1910년 건립한 덕수궁 석조전은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복원돼 최근 문을 열었다. 석조전은 일제강점기 미술관으로 바뀌어 내부가 심하게 훼손됐지만, 설계도와 사진 고증을 거쳐 원형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란을 떠난 선조가 돌아와 덕수궁을 임시 거처로 썼다”며 “고종이 아관파천 직후 경복궁을 버리고 덕수궁으로 환궁한 것은 선조의 고초를 되새기며 항일 의지를 내세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5월부터 개최한 ‘황제국의 상징, 환구단과 환구제((원,환)丘祭)’ 전시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된다. 하늘에 드리는 제사인 환구제는 유교 문화권에서 오직 황제만 주관할 수 있다는 이유로 1464년 중단됐다. 고종은 중국과 종주국 관계를 끊고 자주독립국으로 일어서겠다는 취지에서 환구단을 400여 년 만에 복원하고 황제 즉위식을 이곳에서 거행했다. 고궁박물관은 환구제에 사용한 대한제국 유물을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했다.

이와 관련해 국립국악원은 고종의 황제 즉위식을 궁중음악과 무용으로 재현한 ‘대한의 하늘’ 공연을 올 4월 개최했다. 국악원은 ‘고종대례의궤’에 적혀 있는 고유제와 즉위식, 황태자 책봉식 등을 세밀하게 고증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뜨거운 감자’다. 무엇보다 대한제국 위정자들이 망국의 역사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대한제국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보다는 왜 망했는지를 규명하고 반성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역사학계는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갈려 대한제국에 대해 상반된 시각을 내놓고 있다. 조선 후기 사회가 자체적인 근대화 동력을 갖췄다고 보는 내재적 발전론은 고종과 대한제국을 긍정적으로 그린다. 2004년 양측이 치열한 지상 논쟁을 벌일 당시 이 명예교수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은 일제의 침략으로 미완에 그쳤지만 근대화에 대한 열망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밝혔다.

반면 이영훈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조선 후기를 소농(小農) 사회로 규정하고, 부농과 빈농의 발생과 같은 근대화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도 처음부터 명확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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