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이팝나무 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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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와 만난 건 우연이었다. 한적한 시골길을 천천히 드라이브하다가 ‘이팝나무’라고 쓰인 작은 팻말을 보았다. 춘궁기에 작고 하얀 꽃을 탐스럽게 피우는 모양이 하얀 쌀밥처럼 보여서 이팝(이밥)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쯤 꽃이 피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팻말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니 커다란 고목 한 그루가 오월의 햇살 아래 신록의 잎사귀를 나풀거리고 있었다. 수령이 250년이나 된다고 적혀 있었다.

“너무 일찍 오셨네요!”

꽃이 피지 않아 실망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여인이 우리 부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꽃이 피려면 보름은 더 있어야 해요. 저희 집에서 차 한잔하고 가실래요?”

이팝나무가 보이는 베란다에서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며 집주인 부부와 인사를 나눴다. 경기 성남시에서 살다가 작년에 전북 고창으로 귀촌했다는 부부는 이팝나무가 내 집 정원수처럼 바라다 보이는 게 좋아서 이곳에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동네 어르신들이 이 동네에서 가장 젊으니까 나무를 관리하라고 하셔서 어제 풀을 죄 뽑아줬어요.”

어쩐지, 나무 아래 넓은 터가 잡초 하나 없이 깨끗해서 막 세수한 얼굴처럼 개운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부부가 나무지킴이가 된 덕분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팝나무가 이 부부를 부른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은퇴를 앞두고 귀촌할 곳을 찾아다니던 부부의 발길이 고향도 아닌 이곳에서 멈출 수 있었을까. 수십 년 살던 성남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정착하여 이팝나무의 지킴이가 되다니 나무의 기운이 보통이 아니다 싶다. 게다가 그냥 스쳐갈 뻔했던 우리 부부까지 불러 인연을 맺게 해주다니!

“밤에 하얗게 꽃 핀 나무를 바라보면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 같아요.”

아, 그 말에 낚였다. 보름 후에 나는 다시 그곳에 가고야 말 것 같다. 별이 튀밥처럼 흩뿌린 밤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는 이팝나무를 상상하니 내 눈으로 꼭 보고 싶다. 배고프던 시절 하얀 쌀밥을 고봉으로 담아주던 후덕한 인심처럼 처음 본 사람에게도 커피 한잔을 선뜻 대접할 수 있는 부부가 있어 더욱 그곳에 다시 가고 싶어진다.

예전에는 이팝나무 꽃이 풍성하게 피면 풍년이 온다고 믿었다는데 이팝나무는 지금도 사람들에게 풍성한 사연을 만들어주는 나무인가보다.

윤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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