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사비도성’…수도 역할 외에도 이렇게 깊은 뜻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일 1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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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를 보면 그 나라가 어떤 곳인지 대략 파악할 수 있다. 6세기에 최고 전성기를 맞은 백제의 위엄을 만방에 공표할 도읍지로서 백제 26대 성왕이 세운 수도 사비(현재 부여)는 백제의 철학과 정서를 잘 보여준다. 특히 사비는 100% 계획도시로 설계자의 의도를 곳곳에서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백제는 5세기 말 고구려에 패해 수도 한성(서울)을 뺏기고 급히 웅진(공주)으로 천도했다. 임시수도였던 만큼 터도 좁고 도성 구조도 적을 막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무령왕을 거쳐 성왕에 이르면서 강국으로 부활한 백제는 새 위상에 걸맞은 위대한 수도를 필요로 했다.

부소산과 백마강에 둘러싸인 너른 땅 사비는 방어가 용이했을 뿐만 아니라 강을 타고 바다로 나가 해외교류에 나설 수 있었고 농사를 짓기도 적합했다. 마침내 서기 538년 신수도 사비에 도로망과 1만여 채의 집이 짜임새 있게 들어선다.

사비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으로 구성돼있던 옛 수도 한성의 도시구조를 이어받아 평지에는 왕궁인 사비왕궁, 후방에는 피난용 산성으로 부소산성을 뒀다. 웅진 시기 잠시 맥이 끊겼던 백제의 전통을 다시 잇는 것으로 정체성과 존재감을 다시 회복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당대 가장 잘 나가던 중국 수도들인 남조의 건강성과 북조의 낙양성을 벤치마킹해 새 수도를 단장하면서도 백제식 변형을 가했다. 일례로 사비 나성을 들 수 있는데, 나성(羅城·도성과 시가지를 둘러싸 안팎을 구분하고 방어기능을 하는 성)이라는 개념은 낙양성에서 처음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백마강을 자연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밖을 둘러 파서 못을 만든 것)로 쓰고 부소산 지세를 이용해 성벽을 쌓는 등 나성 건축에 자연 지형을 이용한 것은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시가지 중심에는 국가사찰인 정림사를 세워 불교가 도성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도록 했다. 정림사를 시가지 중심에 세운 것은 낙양성의 영녕사를 모델로 한 것이다.

새로운 수도의 위엄을 뽐낼 수 있도록 도성 내 모든 건축물은 중국의 선진기술을 흡수하거나 백제 스스로 갈고 닦은 건축기술 역량을 총동원해 지었다. 부소산성 성벽은 나무로 만든 틀에 흙을 켜켜이 다져 넣어 강도를 높이는 판축기법으로 지었고, 습지 등 지반이 약한 곳에 건축물을 올릴 때에는 나뭇가지나 잎을 깔고 흙을 다져 넣는 부엽공법이 사용됐다.

사비 나성에는 판축기법으로 쌓은 성벽 외부에 돌을 덧대 방어력을 높인 백제 고유의 토심석축 기법이 적용됐다. 이밖에 여러 사찰과 관북리 왕궁 유적에서 기와를 수평으로 혹은 서로 맞대어 쌓는 독창적인 방식의 ‘와적기단’을 볼 수 있다.

사비 천도라는 대역사를 진행하며 고도로 발전한 백제의 건축기술은 뒷날 신라와 일본으로도 전해진다. 경주 월성 북서쪽의 고상건물지(습기를 막기 위해 바닥을 지면보다 높게 올린 건물)는 사비도성의 대벽건물지(기둥을 촘촘히 세워 벽체를 만든 건물)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이곳에서 출토된 평기와 역시 백제의 기와 제작기술이 쓰였다. 또 일본 규슈 다지이후(大宰府) 주위의 오노죠(大野城), 미즈키(水城)는 백제에서 건너간 부엽공법과 판축기법으로 지어진 것들이다.

현재 사비도성은 아쉽게도 터전만 남아있다. 하지만 국가중흥의 정신을 바탕으로 설계하고 고도의 건축기술로 완성한 이곳은 흔적만으로도 한국인들에게 영원히 자부심으로 기억될 만하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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