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변신 ‘옛 공간사옥’ 가보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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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힘없이 짜인 동선따라 작품 빼곡… 발길-눈길 엇박자 느낌

3층 별실에 전시된 필리핀 작가 제럴딘 하비에르의 ‘시간을 엮는 자들’(2013년). 작품 앞에 무심히 놓아둔 냉방설비가 시선을 어지럽힌다. 관람객의 동선을 고려해 보완해야 할 부분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3층 별실에 전시된 필리핀 작가 제럴딘 하비에르의 ‘시간을 엮는 자들’(2013년). 작품 앞에 무심히 놓아둔 냉방설비가 시선을 어지럽힌다. 관람객의 동선을 고려해 보완해야 할 부분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서울 종로구 원서동 219번지에서 건축설계 일을 했던 이는 한 대뿐인 컬러프린터를 쓰기 위해 여러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하지만 불편함을 토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故) 김수근의 ‘옛 공간 사옥’이 한국 현대건축의 백미로 인정받은 건 그 때문이었다. 들어가 머물고 움직이기 좋도록 잘 비워놓은 건물.

지난해 11월 주인이 바뀐 이 건물의 이름은 이제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다. 150억 원을 들여 건물을 매입한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63)은 자신의 컬렉션에서 선별한 작품 96점으로 연면적 1061m²의 옛 구관을 빽빽이 채웠다. 다음 달 1일 개관을 앞두고 새롭게 단장한 공간을 21일 언론에 공개한 그가 5층 계단 앞에서 말했다.

“계단을 워낙 좁게 만들어 놓아서 불편해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40년 넘게 희귀한 공공문화 영역의 역할을 버텨 왔던 공간의 운명이 어떻게 됐는지, 김 회장의 이 한마디가 잘 설명해 준다. 김수근의 생전 작업공간을 기념관으로 보존하겠다던 김수근문화재단과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김 회장은 “기획전 없이 내 기분에 따라서 컬렉션을 공개하는 곳으로 쓰겠다”고 했다.

독일 작가 요르그 임멘도르프의 그림 ‘루돌프 바로에게 자유를’. 김수근의 옛 작업공간은 그의 전시실로 바뀌었다.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독일 작가 요르그 임멘도르프의 그림 ‘루돌프 바로에게 자유를’. 김수근의 옛 작업공간은 그의 전시실로 바뀌었다.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개관전 ‘Really?’에 소개한 작가는 43명이다. 백남준, 수보드 굽타, 키스 해링, 신디 셔먼 등 유명 작가의 작품 사이에 김 회장의 설치작품도 끼여 있다. 막힘없이 짜인 동선(動線) 어디에도 작품을 진열하지 않고 그냥 비워둔 곳이 없다. 화장실 변기와 개수대 위까지 작품을 걸어놓았다. 발길과 눈길이 엇박자를 낸다.

‘좁은’ 계단에는 철제 난간을 덧댔다.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관람객의 안전을 고려해 소방시설과 이동로 설비를 보강했다”는 것이 갤러리 측 설명이다. 천창(天窓)이 뚫린 최상층 보이드(void·수직으로 뚫린 공간) 둘레에도 나무 난간을 한 층 더 얹었다. 리모델링에 참여한 최창렬 공간건축 차장은 “(김 회장이) 백화점 사업을 해서인지 안전에 무척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명목상은 공간건축에서 리모델링 실무를 맡는 것으로 돼 있었지만 실제 작업은 다른 인테리어업체가 주도했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건물을 고치는 건 주인의 당연한 권리지만, 건축가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남겨줬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다채로운 문화 공연이 열리던 지하 공연장에는 연무를 내뿜는 피에르 위그의 설치작품 ‘반짝임 탐험’이 놓였다. 야외 마당 문화행사 참여자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신관과 구관 사이 반지하 연결로는 매표소로 바뀌며 사라졌다. 김수근에 이은 공간의 2대 대표인 고 장세양이 설계한 유리외벽 신관은 빵집, 카페, 이탈리안 레스토랑, 일식당으로 채워졌다. 창덕궁을 굽어보는 레스토랑은 인기를 끌 명소가 될 것이 틀림없다.

문득 뒤돌아본 건물 위로 유일하게 지켜진 새 건물주의 약속이 보였다. 외벽 꼭대기의 흰색 ‘空間’ 간판만은, 덩그러니 원형 그대로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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