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神보다 두려운 兄… 광기의 시대 아이러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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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들의 세계사/이기호 지음/312쪽·1만3000원·민음사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이 소설의 주요 모티브다. 당시 불타고 있는 문화원 건물. 동아일보DB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이 소설의 주요 모티브다. 당시 불타고 있는 문화원 건물. 동아일보DB

“들어 보아라. 이것은 이 땅의 황당한 독재자 중 한 명인 전두환 장군의 통치 시절 이야기다.” 이렇게 소설은 시작한다.

보육원 출신인 주인공 나복만(羅福滿)은 복이 가득하다는 이름과 달리 박복했다. 그는 1982년 강원 원주시 회사택시 신입기사였다. 성실한 그는 개인택시 면허를 따고 동거하던 애인과 결혼하는 소박한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해 3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주도한 문부식과 김은숙이 원주에 왔고, 나복만은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교통사고를 냈다.

준법정신이 투철한 나복만은 교통사고를 신고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아가지만 글을 읽을 줄 몰라 교통과 대신 대공수사를 담당하는 정보과를 찾아가 제 이름을 적는다. 독재정권은 까막눈이 나복만을 빨갱이로, 수배자로 둔갑시킨다.

원주 출신인 저자는 걸출한 입담을 뽐내는 변사(辯士)다. 소설의 장마다 “들어 보아라” “읽어 보아라”라며 나복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복만이 잠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애인과 엉덩이를 반쯤 깐 채 키스하는 장면을 들려줄 땐 광대 목소리고, 복만의 소박한 꿈이 고문과 수배로 물거품처럼 사라질 땐 먹먹한 목소리다. 특히 괄호 속에 쓴 부연 설명들이 눈물나게 웃기거나 슬프다. 요즘 말로 개웃프다. 이야기의 힘은 우리를 꽉 쥐고 ‘누아르’ 정권의 죄를 똑똑히 보게 만든다.

소설은 계간지 ‘세계의 문학’에 2009년 가을부터 2010년 겨울까지 연재됐던 ‘수배의 힘’의 제목을 바꿨다. 저자의 첫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가 개인과 개인 사이 죄의식을 다뤘다면 이번 소설은 개인과 국가 사이의 죄를 다뤘다. ‘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은 개인과 제도·문화 사이의 죄가 될 거라고 한다. 차남은 어디서 나온 걸까.

“우린 모두 형제들이고, 이 세상은 두려운 한 명의 형과, 두려움에 떠는 수많은 동생들로, 차남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라는 말씀도 하셨지요. 더 큰 문제는 우리 차남들 스스로가 형을 두려워하다가 숭배마저 하게 된 상황, 신보다 형을 더 믿게 된 현실을 개탄하기도 하셨지요.”(279쪽)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책의향기#차남들의세계사#이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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