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조어도-독도 영토편입 주저했던 日, 청일-러일전쟁 승리후 태도 바꿔 강제편입”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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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호 동국대 교수 논문서 밝혀… 日영유권 주장 반박 중요 논거될 듯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 군함이 청나라 북양함대를 공격하는 장면.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조어도 영토 편입에 부정적이던 기존 입장을버리고 강제로 편입했다. 동아일보DB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 군함이 청나라 북양함대를 공격하는 장면.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조어도 영토 편입에 부정적이던 기존 입장을버리고 강제로 편입했다. 동아일보DB
일본 정부가 19세기 말 조어도(釣魚島·중국명 댜오위다오, 일본명 센카쿠 열도)의 영토 편입을 스스로 보류한 사실이 국내 학자에 의해 새로 밝혀졌다. 이는 조어도와 마찬가지로 무주지(無主地) 선점론을 적용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중요한 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전쟁기념관 주최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동국대 한철호 교수의 논문 ‘청일·러일전쟁과 동아시아 영토문제’에 따르면 일본이 조어도와 독도를 영토로 편입할 때 결정적인 변수는 청일·러일전쟁이었다. 당초 일본 정부는 두 섬 모두를 영토로 보지 않았는데, 전쟁이 승세로 기울자 입장을 바꿔 강제 편입에 나섰다는 것이다.

조어도와 가까운 오키나와 현청은 1885년 11월 이 섬에 표지를 세우고 일본 영토로 편입하자고 중앙정부에 요청했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즉각 보류 지시를 내놓았다. 당시 일본 외무성은 △조어도가 중국 국경에 더 가깝고 △중국이 섬 이름을 붙였으며 △중국 정부와 일반인들의 반일(反日)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 등을 내세워 거절했다. 일본 외무성은 당분간 조어도를 실지 답사해 항만 형태만 파악해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또 답사 자료가 언론에 유출돼 중국을 자극해선 안 된다는 조건을 붙였다.

한 교수는 일본 외무성의 신중한 태도가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청나라, 일본의 힘겨루기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일본이 한반도를 단독 점령할 정도로 국력이 강하지 못한 국면에서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면 중국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갑신정변 직후 중국과 톈진조약을 맺고 한반도에서 공동 철군을 결정한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태도를 180도 바꾼다. 1894년 12월 일본 내무성은 갑자기 “조어도는 주인 없는 땅”이라며 조어도의 중국 영유권을 부정하고 영토 편입에 나섰다.

이어 일본은 한반도 강점의 마지막 걸림돌이던 러시아마저 러일전쟁으로 물리치자 1905년 독도 역시 무주지 선점론을 내세워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성 소속 수로부(水路部)가 1896년 제작한 ‘조선 전안(全岸)’에는 이미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으로 기재돼 있었다.

독도 편입 11년 전 오키나와에서 410km나 떨어진 조어도를 선점한 일본이 오키 섬에서 160km 떨어진 독도를 편입하지 않았다는 건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한 교수는 “일본은 조어도와 독도가 각각 중국과 한국의 영토라는 걸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청일·러일전쟁에서 이기자 무주지 선점론을 내세워 빼앗은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일본#독도#조어도#한철호#청일·러일전쟁과 동아시아 영토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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