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2200년간의 ‘동서고금 紙愛’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6일 03시 00분


코멘트

◇종이가 만든 길/에릭 오르세나 지음·강현주 옮김/360쪽·1만6000원·작은씨앗
인류 매혹시킨 종이의 세계정복記

누군가 내 나이를 묻는다면 ‘글쎄요’라고 수줍게 답해야 한다. 한동안은 기원후 100년 전후 채륜이라는 인물이 나의 아버지라고 알려졌었는데 최근 조사 결과 기원전 2세기까지로 확장됐다. 대략 2000살은 넘은 셈이다. 고향은 확실하다. 중국이다. 드넓은 중국 땅 중에서 어디냐고 묻는다면 기찻길 옆 오막살이가 아니라 북부 타클라마칸 사막이나 고비 사막 근처 비단길(실크로드) 주변 건조지대라고 말하겠다. 왜 건조지대냐고? 난 습기엔 약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중국의 4대 발명품으로 화약, 나침반, 인쇄술 그리고 나를 뽑는다. 그런 점에서 비단보다 내가 더 귀한 존재다. 내 한자명과 비단을 뜻하는 한자어에는 모두 ‘실 사((멱,사))’자가 들어간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비단길은 내 세계정복기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751년 7월 고구려 출신 명장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 군대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인근의 탈라스 강가에서 격전을 벌였다. 승리는 이슬람군에 돌아갔고 나의 비밀도 처음으로 아랍제국의 손에 떨어졌다. 자, 이제 내 이름을 밝히겠다. 나는 종이다.

아랍제국의 왕들은 곧 나에게 매료됐다. 무엇보다 난 정직하니까.

8세기까지 중국을 제외한 지역에선 나보다 1000살은 더 많은 내 사촌 파피루스 아니면 양피지에 글을 썼다. 염소, 송아지 가죽을 무두질해 만든 양피지는 물론이고 나일 강변에 자라는 갈대의 줄기를 겹겹이 얽어서 만든 파피루스는 두꺼웠다. 그래서 뒷면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글자를 긁어내거나 바꿔치기가 가능했다.

하지만 균질한 섬유질 반죽으로 만들어진 나는 얇고 반투명했기에 위·변조를 할 경우 쉽게 들통이 났다. 아랍의 칼리프들은 제국 곳곳에서 올라오는 거짓 없는 보고 때문에 나를 사랑했다. 상인들은 계약의 투명성을 지킬 수 있어 나를 사랑했다. 그리고 코란을 옮겨 적은 행위를 기도와 동일시한 무슬림에게 나는 신의 존재를 품는 존재이기에 이슬람 사원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중국제국과 아랍제국까지 정복한 내게 남은 것은 기독교 제국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은 완고했다. 내가 아랍 출신이라 생각해 불경스러운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황제는 1221년 모든 행정문서에서 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1250년 전후로 나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거점 삼아 대량생산되기 시작했다. 특히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인 이탈리아 아시시에선 가죽 삶을 때 쓰는 물을 사용하다가 동물성 젤라틴이 종이의 접착력을 높임을 발견했다. 식물과 동물의 만남으로 나는 더욱 강해졌다.

동쪽인 일본으로 가면 나는 신의 경지에 오른다. 기원후 600년경 한반도를 통해 종이 제조기술을 전수받은 일본에선 한반도와 가까운 후쿠이 현 에치젠이 종이의 성지다. 특히 한지의 3종 세트라 할 닥나무, 삼지닥나무, 안피가 골고루 자라 전통 제지소가 몰려 있는 이마다테 마을에선 종이의 신, 가와가미 고젠을 섬기는 신사가 있다. 뿐만 아니다. 8세기 이후 33년마다 3일간 나를 기리는 33식년 축제가 1200년간 지속되고 있다.

면화의 정치경제사를 담아낸 ‘코튼 로드’로 격찬을 받은 프랑스 작가 에리크 오르세나는 나에 대한 오마주를 담아내기 위해 5대륙 15개국을 섭렵했다. 유럽에선 넝마주이란 청소부가 나의 재료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발견하고, 인도에선 마하트마 간디와 종이기술자 알라 바즈의 만남으로 인도가 종이강국이 됐음을 알아낸다. 최고의 종이가 내구성이 강하고 가벼우며 글자와 그림이 선명하게 인쇄될 수 있는 포장지라는 점도 터득한다.

책은 이렇게 나, 종이에 대한 경이로운 정보가 가득하다. 하지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고 오탈자가 많은 점이 눈에 거슬린다. 프랑스어를 우리말로 직역해 씨(氏)를 시로, 우루무치를 우름키로, 신장위구르를 진지앙 위구르로, 우마미야를 오메이야드, 연(蓮)을 로뎌스로 어설프게 옮겨 놨다. 곳곳에서 프랑스식 위트 넘치는 문장을 ‘썰렁한 유머’로 전락시킨 번역도 아쉽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종이가 만든 길#종이#아랍제국#중국제국#일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