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일기 아닌 일기… 고독하지만 아름다운 사색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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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서(書)/페르난두 페소아 지음·배수아 옮김/808쪽·2만8000원·봄날의책

‘부조리하고 앙상한 내 방 책상 앞에서, 이름 없고 하찮은 사무원인 나는 쓴다. 글은 내 영혼의 구원이다.’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사진)는 생전에 무역통신문 번역가로 일하며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살았다. 생전에 몇 편의 시를 발표했을 뿐 작가로선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

페소아가 세상을 떠난 뒤 친구들은 방에서 커다란 궤짝을 발견했다. 시, 산문, 희곡, 평론, 정치론 같은 광범위한 분야의 텍스트와 단상이 공책과 낱장 종이, 편지지, 전단 뒷면에 적혀 있었다. 페소아의 유고는 2만7543장이나 됐다.

이 가운데 페소아가 자필로 ‘Livro do Desasso-ssego(불안의 서)’라고 써서 묶어놓은 한 덩이의 원고를 연구자들이 정리했다. 1인칭 화자가 이끌어 가는 일상은 적요하다.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에게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라는 다른 이름, 즉 이명(異名)을 지어준다. 작가와 완전하게 일치하는 동일 인물은 아니지만 개성과 정체성을 상당 부분 반영했다. 그래서 이 책은 ‘저자 아닌 저자의 작품이자 책 아닌 책, 일기 아닌 일기’(‘옮긴이의 글’ 중)다. 일기이자 메모이며, 회고이고 사색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의 단추를 풀고 지갑을 꺼내기 귀찮아서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지 않은 것처럼, 삶은 나를 그렇게 대했다. 적막에 잠긴 내 방에서, 슬픔으로 나는 글을 쓴다. 항상 그랬듯이 혼자이며, 앞으로도 항상 혼자일 것이다. 무의미할 것이 분명한 나의 목소리는 수천의 목소리의 본질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

작가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나’를 끝없이 파헤치면서 내면의 저 바닥까지 살피고 탐구한다. 외면의 일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들여다봄으로써 생겨나는 불안이 깃든 문장은 고독하지만 아득하도록 아름답다.

국내에 2012년 ‘불안의 책’(까치)이라는 제목으로 이탈리아어판과 영어판을 참고해 248쪽 분량으로 발췌해 번역한 책이 나왔다. 이번 완역본은 페소아가 20년에 걸쳐 쓴 산문 480여 편을 소설가 배수아가 독일어판과 영어판을 참고해 완역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불안의 서#페르난두 페소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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