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vs 책]진시황강의 對 직하학연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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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를 보는 중국인의 두 시선
◇진시황강의/왕리췬 지음/홍순도 홍광훈 옮김/748쪽·2만2000원/김영사
◇직하학연구/바이시 지음/이임찬 옮김/578쪽·2만8000원/소나무

제자백가 사상을 집약했던 제나라 직하학궁의 좨주(祭酒)를 세 차례나 연임한 직하학 최후의 대학자 순자(왼쪽)와 550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운 진시황. 제나라의 문화주의를 대표하는 순자가 제자백가 사상의 종합을 꿈꿨다면 진나라의 전제주의를 대표하는 진시황은 이를 해체하고 법가 중심의 일사불란한 통일을 꿈꿨다. 소나무·김영사 제공
제자백가 사상을 집약했던 제나라 직하학궁의 좨주(祭酒)를 세 차례나 연임한 직하학 최후의 대학자 순자(왼쪽)와 550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운 진시황. 제나라의 문화주의를 대표하는 순자가 제자백가 사상의 종합을 꿈꿨다면 진나라의 전제주의를 대표하는 진시황은 이를 해체하고 법가 중심의 일사불란한 통일을 꿈꿨다. 소나무·김영사 제공
중국 전국시대를 다룬 두 권의 책이 나왔다. 왕리췬(王立群·68) 허난대 문학원 교수의 ‘진시황강의’와 바이시(白奚·60) 수도사범대 교수의 ‘직하학연구’. 같은 시대를 다룸에도 두 책은 여러 모로 대조적이다.

‘진시황강의’는 중국 CCTV의 인기 역사프로그램 ‘백가강단’에서 왕 교수가 진행하는 사기(史記) 강연 중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룬 진시황(기원전 259∼210)에 대한 내용만 묶은 것이다. 폭군 이미지가 강한 진시황을 ‘중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웅’으로 재조명했다. 대중적이고 잘 읽힌다.

‘직하학연구’는 동양 최초의 싱크탱크 집단이었던 직하학궁의 150년 역사(기원전 374∼221년)와 그 성과를 학술적으로 검토한 책이다. 직하학궁은 제나라 도성 임치에 세워진 학술연구기관. 여기서 이뤄진 제자백가 사상의 교류와 융합의 성과물이 직하학이다. 책의 주인공은 그 학자들이다. 전문적이고 어렵다.

○ 영웅사 대 지성사

‘진시황강의’는 1990년대 이후 부쩍 강화된 중국 민족주의가 투영돼 있다. 진시황은 분서갱유와 아방궁으로 대표되는 폭군이 아니라, 550년간 분열됐던 중국 대륙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룩한 전무후무한 천고일제(千古一帝)로 격상된다. 대륙을 통일했지만 문화혁명의 과오를 저지른 마오쩌둥(毛澤東)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해석이다.

진시황은 현실주의적 부국강병책으로 중국의 영토를 오늘날의 베트남 북부까지 확대한 지도자이자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관철한 시대를 앞선 정치가로 새롭게 평가된다. 700여 명의 유학자를 조직적으로 생매장했다는 갱유는 유학자가 아니라 허황된 불로장생을 약속했던 도가 계통의 술사 460여 명에 대한 보복이었던 것으로 축소된다. 제자백가의 사상서를 불태운 분서는 우민화정책이라기보다는 군현제를 관철하기 위해 공리공론을 일삼는 선비들에 대한 정치적 견제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엔 전국시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깔려 있다.

반면 ‘직하학연구’에는 전국시대야말로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진정한 백가쟁명과 백화제방이 이뤄졌다는 긍정적 인식이 깔려 있다.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고 능력 본위의 사회가 이뤄지면서 비천한 신분 출신도 학문을 연마해 입신출세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 혁명적 사상의 폭발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바이시 교수는 특히 전국시대 들어 하급관료밖에 할 수 없었던 사인(士人)들이 학문 연마를 통해 엄청난 봉록을 받으며 군주의 스승 내지 친구를 자처할 수 있게 된 점에 주목했다. 많게는 선생 3000명과 그 밑에서 학문을 배우는 학인 수천 명을 둔 직하학궁은 바로 그런 브레인의 산실이었다.

○‘아테네’ 제나라 대 ‘스파르타’ 진나라

풍요로운 땅에 농업과 상공업이 모두 발달하고 북으로 발해, 동으로 황해를 끼고 있던 제나라는 강태공의 봉국으로서 본디 개방적 문화가 발달했다. 반면 주나라 서쪽 변방의 산악지대에서 출발한 진나라는 서융과 치열한 무력투쟁을 통해 성장한 폐쇄적 전쟁국가였다.

이런 두 나라만 놓고 보면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중 양대 라이벌이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구도가 고스란히 겹쳐진다. 직하학궁에 비견될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를 배출한 아테네가 이후 수천 년 서구사상사의 원형을 배출한 반면 냉철한 법가사상에 입각해 부국강병을 추구한 진나라처럼 군국주의 국가에 가까웠던 스파르타가 패권투쟁의 최후 승자가 된 점도 닮았다.

중국의 통일을 진이 이룩했지만 그 사상적 배경을 이룬 법가도 제나라 직하학궁의 산물이었다. 그 법가사상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한비자와 실천적 기획가였던 이사는 순자(기원전 298∼238)가 수장으로 있던 직하학궁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왕리췬 교수는 진 제국이 통일 이후 15년 만에 멸망한 이유를 하드웨어(제도)는 강했지만 소프트웨어(사상)가 약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겉으론 유가를 표방하면서 속으론 법가를 따른다는 외유내법(外儒內法)의 전통이 진시황을 반면교사로 삼아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외유내법의 진정한 저작권은 유가의 덕치와 법가의 법치를 예치(禮治)로 융합한 직하학의 완성자 순자에게 있지 않을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진시황강의#직하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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