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강렬한 심리변화… 강렬한 조명… 근대극의 고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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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채권자들’ ★★★★

‘스트린드베리의 연극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웃음과 슬픔이 교차하는 남녀 삼각관계의 역설적 원형을 형상화한 ‘채권자들’. 순정파 화가인 아돌프 역의 김영필과 그와 재혼한 뒤 소설가가 된 테클라 역의 길해연. 컬티즌 제공
‘스트린드베리의 연극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웃음과 슬픔이 교차하는 남녀 삼각관계의 역설적 원형을 형상화한 ‘채권자들’. 순정파 화가인 아돌프 역의 김영필과 그와 재혼한 뒤 소설가가 된 테클라 역의 길해연. 컬티즌 제공
스트린드베리가 왜 ‘근대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지 의아했다면 이 작품을 보기를 권하겠다. 인간의 역설적 애정심리에 대한 예리한 통찰, 기지 넘치면서도 문학성 풍부한 대사, 신화적 원형성을 지녔으면서도 매력 넘치는 캐릭터, 짧지만 뚜렷한 구조적 완결성….

지난해 초연한 ‘과부들’로 동아연극상 작품상과 올해 이해랑연극상을 거머쥔 연출가 이성열 씨는 최근 개막한 ‘채권자들’에서 희극과 비극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펼치며 고품격의 무대를 빚어낸다. 고급스러운 목조무대와 세련된 의상, 그리고 인물의 강렬한 심리 변화에 맞춘 강렬한 조명을 통해 이 치정의 드라마가 근대극의 고전이 된 이유를 뚜렷이 보여준다.

등장인물은 딱 셋. 매력적인 재혼녀 테클라(길해연)를 중심으로 스무 살 연상의 전 남편 구스타프(이호재)와 열 살 연하의 현 남편 아돌프(김영필)다. 아내를 뺏긴 구스타프가 자신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아돌프에게 몰래 접근해 아돌프-테클라 부부관계를 파멸로 몰고 가는 이간질을 펼친다는 내용이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TV 아침드라마처럼 진부해 보인다. 연극적 묘미는 남녀 삼각관계가 초래하는 역설적 상황을 예리하게 해부하고 풍자한 대사와 이를 실감나게 전달하는 배우들의 연기에서 우러난다.

노회한 과학자 구스타프 역을 맡은 70대 배우 이호재는 ‘파우스트’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오셀로’의 이아고를 합쳐 놓은 듯한 능수능란한 화술로 아돌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불륜에 빠진 남녀는) 그 어둠을 뚫고 누군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걸 느끼게 돼. 겁이 날 수밖에. 일단 겁에 질리자, 그 부재자(남편)가 그들 앞에 나타나는 거야. 사랑의 단잠을 깨우는 악몽으로, 침실 문을 두드리는 채권자가 되어 나타나는 거지.”

누군가 보고 있다는 죄의식은 불륜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남녀관계에 적용된다. 사랑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 밖에서 남몰래 이뤄지기에 짜릿한 것이다.

순정파 예술가 아돌프는 이런 사랑의 원리를 모른다.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자신 역시 테클라에게 버려져 제2의 구스타프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빠진다. 그래서 테클라에게 이렇게 토로한다.

“난 기분 나쁜 채권자로 변했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채권자. 그러자 당신은 나한테 진 빚을 없애고 싶어졌어. 내 계좌에서 끌어 쓰던 걸 멈추고 다른 대출자를 찾았지. 당신은 내가 싫어지기 시작한 거야.”

테클라는 남녀의 사랑을 채권-채무의 관계로 바라보는 두 남자를 조롱하며 사랑은 증여(“사랑은 주는 것이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방적 증여 관계로 이뤄진 사랑에는 늘 핏빛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세 사람 모두 연극의 마지막에서야 깨닫게 된다. 사랑에 대한 냉소적 제목과 달리 사랑에는 채권자는 없고 채무자만 있다는 역설을 일깨워 주는 연극이다.

: : i : :

26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3만5000원. 02-765-5476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채권자들#스트린드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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