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끼고 우려먹고… 자극적 맛만 내는 ‘문화 MSG’에 중독 증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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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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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는 한국의 대중문화, 지금이 왜 위기인가

24일 서울의 한 멀티플렉스에서 ‘신세계’를 본 홍민정 씨(30)는 경찰이 범죄조직에 침투하는 모티프 때문에 홍콩 영화 ‘무간도’(2002년)를 떠올렸다. ‘7번방의 선물’이 미국 영화 ‘아이 엠 샘’과 큰 맥락이 닮았다고 느꼈던 홍 씨는 “최근 영화나 TV 프로그램이 다양해졌다고는 하지만 종종 기시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난해 한국 영화를 본 관객이 1억 명을 돌파했다. 1000만 관객 영화가 쏟아졌지만 콘텐츠의 창의력은 떨어졌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기존 인기작의 흥행 코드를 그대로 따 온 문화콘텐츠가 인기몰이를 하기 때문이다.

인공감미료 MSG(글루탐산나트륨) 중독 문제는 한국 음식문화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한국의 대중문화 속에도 ‘문화적 MSG’ 중독 현상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비슷비슷한 콘텐츠에 인공적인 감칠맛만 가미하는 현상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가 영화진흥위원회의 2011년∼2013년 3월 흥행 영화 통계를 분석한 결과 흥행 10위 안의 70%에서 기존 할리우드 영화의 포맷과 유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5위 ‘써니’, 8위 ‘완득이’, 10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외하고 다른 영화의 뼈대를 그대로 가져온 셈이다.

1위 ‘도둑들’(1298만 명)은 ‘오션스 일레븐’(2002년), 2위 ‘광해, 왕이 된 남자’(1231만 명)는 미국 영화 ‘데이브’(1993년)의 배경 설정과 스토리 전개가 빼닮았다. 3위 ‘7번방의 선물’(1092만 명)은 배경만 교도소일 뿐 영화 ‘아이 엠 샘’에서 지적장애를 가진 아버지가 반강제로 딸과 떨어지는 설정과 어른스러운 딸 설정이 유사하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4위 ‘최종병기 활’(746만 명)은 ‘아포칼립토’(2007년)를 닮았고, 9위 ‘타워’(518만 명)는 컴퓨터그래픽(CG)과 스펙터클만 발전했을 뿐 1970년대 재난 영화 ‘타워링’ 플롯의 재탕”이라고 말했다. 이인화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가 개발한 디지털 스토리텔링 소프트웨어 ‘스토리 헬퍼’ 분석에 따르면 표절 논란까지 일었던 ‘광해…’는 ‘데이브’와 75% 유사한 걸로 조사됐고 ‘최종병기 활’과 ‘아포칼립토’는 79%까지 비슷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영화뿐만 아니다. TV를 봐도 사정은 비슷하다. 출생의 비밀과 기억상실증이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드라마와 외국 포맷을 사용한 예능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동아일보가 시청률 조사기관 AGB닐슨과 함께 지난해 시청률 상위 10개 드라마를 분석한 결과 90%에서 ‘출생의 비밀’이라는 문화적 MSG가 검출됐다. 현재 방영 중인 KBS 주말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은 극 초반부터 이순신(아이유 분)의 출생의 비밀을 부각시켰다. SBS가 20부작으로 4월부터 방영하는 드라마는 제목부터 ‘출생의 비밀’(가제)이다. 기억상실증도 이런 문화적 MSG의 필수 구성요소가 된 지 오래다. KBS2 ‘아이리스2’와 MBC ‘백년의 유산’, SBS ‘돈의 맛’과 ‘당신의 여자’에도 기억상실증 MSG가 쓰인다.

안전하게 과거 성공작을 다시 우려먹는 것도 유행이다. 120부작으로 최근 방송을 시작한 MBC ‘구암 허준’은 1999년에 나온 인기 드라마를 리메이크했다. 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는 일본 드라마(2002년)와 한국 영화(2006년)로 제작된 작품의 리메이크. MBC ‘7급 공무원’은 2009년 400만 명이 넘게 본 동명 영화의 TV 확장판이다.

예능 프로그램은 수입 포맷으로 감칠맛을 내고 있다. MBC의 ‘댄싱 위드 더 스타’, KBS ‘1 대 100’, 케이블 온스타일의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도 외국에서 인기를 끈 프로그램 형식을 그대로 빌려 왔다. 지난해 시청률 5위 안에 든 ‘런닝맨’ ‘무한도전’ ‘해피선데이’ ‘정글의 법칙’은 모두 연예인이 출연해 팀을 짜 미션을 수행하는 방식인데 언제부터인가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면서 차별성이 없어져 간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러한 MSG형 문화콘텐츠가 많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평론가 정지욱 씨는 “생산자는 흥행 실패의 리스크를 최대한 피하려 하고 소비자들은 고달픈 일상 잊기용 즉석식품처럼 대중문화를 즐기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인문학을 멀리하듯이 자극적인 것만 편하게 섭취하려는 게으름이 문화에도 반영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대중적 입맛에 맞춘 문화적 MSG에만 의존하다 보면 한국 대중문화의 전반적 질적 하향평준화를 초래하고 세계시장에서 한류의 경쟁력까지 추락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혜숙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심리적으로 익숙한 자극 대상에 5, 6회 노출된 뒤에는 급격하게 흥미가 떨어지게 마련”이라며 “현재 대중문화의 비슷한 흥행 코드에 쾌락을 느끼는 것도 곧 실증날 것”이라고 말했다. 대중문화평론가 이문원 씨는 “패키징, 마케팅하는 방법만 발달하고 대중문화 전반에 스토리 부재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며 “가공에만 공들이지 말고 독특한 스토리와 창의적 소재 발굴에 투자가 집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금한·김윤종 기자 email@donga.com
#한국 대중문화#문화 M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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